필립 퍼키스 선생의 두 번째 사진집 출간과 전시 관람 후기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류가헌 사진 전시(2015.12.01-12.13)를 보고

 

 

 

 

사진집 정보: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 글/박태희 옮김/안목출판사

 

 

 

* 일러두기: 이 글은 사진 전시를 보고 메모해둔 두서없는 글인데,

안목출판사 사장님께서 제 부끄러운 글을 출판사 블로그에 올려주셨습니다.

 

 

 

#텅빈 철길에 메마르게 서 있는 나무가 있는 사진

   아마도 대부분은 우리 나라의 풍경일 듯하다, 불모의 겨울을 찍은 필립 퍼키스의 이미지들은 절제되어 있으며 고요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져 혼재해있는 어느 지점에 놓여 '거기에' 있는 죽은 생물들마저 겨울 풍경 속에 침잠해있다. 눈 덮힌 텅빈 들판의 풍경은 초월적인 공간의 이미지다. 앗제가 말년에 담은 파리 공원의 초월적인 공간처럼 보이기도한다. 마른 나무가지와 강이 있는 겨울 풍경은 내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억해두었던 뉴욕 주 어느 시골의 겨울 풍경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필립 퍼키스가 대상으로하는 배경은 이미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상실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기차 길 위에는 젊은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이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도시 버팔로에서 대도시 뉴욕으로,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지나갔을 기차길이 겹쳐있다. 나는 겨울 온타리오 호수 가의 적막한 철길을 떠올린다.

 

 #죽은 동물이 반쯤 잠겨있는 사진, ‘-시의 죽음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어둡고 음울하게 드리워진 검은 나무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고 있고, 그 경계에 죽은 동물이 있다. 사체는 수면위로 일부만 나와있다. 처음에는 새일까 아니면 강에 사는 비버 같은 동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면위로 나와있는 부위는 등과 동물의 뾰족한 귀로 보인다. 길다란 목은 한 쪽으로 힘없이 꺾인 채 가느다란 머리 부분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다. 죽어서 물에 불어버린 사슴같다. 내가 여기서 더 놀랐던 이유는 수면 위로 화살의 깃이 살짝 드러나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죽음의 전말이 조금 드러난다. 이 사체는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죽은 후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사슴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밀려나있는 이 존재마저 자연의 질서를 거부당한채 인간의 손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삶이란 죽음에대한 강렬한 저항의 몸짓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질서에 속한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동물에게 닥친 죽음은, 한 생명의 삶이 충만하고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없었던 불-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 무진기행의 한 대목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 속에 비쳐 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물 속에 비쳐있는 냇가의 나무들, 시커멓게 웅크리는 나무들을 소설의 후반에 나오는 자살한 여인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곧 이 시커먼 나무의 그림자들은 죽음의 이미지와 잇닿아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냇가에서 자살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아마도 여인이 새벽 통행금지 사이렌이 해제되던 4시 즈음 죽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시각 슬며시 잠이 들었던 주인공은 그 여인이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며 자기 분열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무진기행의 이 대목이었던 것이다.

 

 #다리 난간에 놓여있는 목장갑이 있는 사진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다리 난간 사이로 검은 개가 사진가를 쳐다보고 있다. 사진가도 분명 난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난간 사이에 보이는 그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있는 검둥 개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늘 속 검둥 개와의 조우! 사진집에 나온 이 사진보다 실제로 필립 퍼키스 선생이 인화한 사진의 톤이 좀더 어둡다. 따라서 실제 프린트를 보며 이 검둥개를 발견하는 데 시간이 좀더 걸렸던 셈이다. 다시말해 필립 퍼키스 선생이 직접 인화한 사진이 내게는 좀더 비밀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에서 인화한 사진을 보다가 사진집을 보면 사뭇다른 느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기도한다.

 

 #눈 덮힌 들판의 풍경

   위 아래로 거대한 트럭의 바퀴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화면의 가운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메마른 땅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눈의 섬들과 왼쪽 위에서 화면을 꽉 덮은 구름의 살짝 열린 부분을 통해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이 정적인 이미지에서 동적 균형을 주는 요소들같다. 한편S자 모양의 바퀴자국은 이 두 요소 사이를 안내하며 나의 시선을 이끌고있다.

 

#고요 속의 움직임

   하늘에 던져진 나무가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물에 뛰어들 테세다. 하늘에 정지해 있는 나무가지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정중동(精中動). 이 사진집에 나온 이미지들은 이 전의 이미지들보다 더 비밀스럽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 사진들은 2007년 사진가가 사진을 60년 가까이 찍어오면서 주로 쓰던 한 쪽 눈을 실명한 이후 찍은 사진들이기에 더욱 그럴 수도 있겠다. 사진가의 인화는 세세한 기교를 초월해있다고 생각한다. 구도가 어떠하고, 노출이 어떠한지에관한 문제들을 너머 사진가는 어둡게 찍힌 사진들은 어두운 그대로를 보여주기위해 인화를 했다고 말하는 대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프린트 마스터 안셀 애덤스의 기교와는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투명한 천막 속 아주머니의 모습

   투명한 천막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뎅 꼬치의 끝으로 보이는 나무 막대들이 있는 테이블에 무표정하게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천막의 밖에 가스통이 있고, 그 위에 씌여진 강원 동해'라는 글자만이 대상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다시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면 깍지낀 두 손이 슬며시 천막 밖으로 나와있다.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손은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는 여인의 심리적 표출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 무위(無爲)의 손은 다시 오른쪽 가스통 위에 구겨진 채 놓여있는, 하얗게 빛나는 고무장갑에 가 닿는다. 이 고무 장갑이 특히 나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있어 이 고무 장갑은 이 사진의 전체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본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을 곧바로 떠올린다. 거리의 아이들을 찍은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에는 누군가 장난감 총을 쥔 채 한 어린 아이의  머리에 겨누고있는데, 정면을 응시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에서 롤랑 바르트는 유독 어린 소년의 썩은 이빨을 끈덕지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 나온 하얀 고무 장갑이 나에겐 롤랑 바르트가 계속 바라보았을 아이의 썩은 이빨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는 사진을 나의 기억과 경험치로만 느낄 뿐이다.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세계를 탐색하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시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나의 오감과 직관을 통한 나의 경험들은 내 외부 세계를 인지함으로써 나 자신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성을 확립하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행위, 셔터를 누르게하는 그 무언가는 지극히 내밀한 나만의 개인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내 개인적인 감정들은 나에게만 정답일 것이며,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는 요소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것(이는 나와는 다른 타인이 느끼는 감성도 그들에게 정답이며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게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사진의 본질이다. 

 

#부인 시릴라의 모습

   차 안에 앉아있는 필립 퍼키스의 부인 시릴라는 유리창문을 통해 사진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반영이 부인의 왼쪽 어깨에 겹쳐져있다. 마치 함께 커플 사진을 찍는 것처럼, 하지만 연륜이 있는 커플 답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가의 부인의 또 다른 사진. 그녀는 가로줄이 나있는 옷을 위 아래 입고있는 노년의 모습이다. 필립 퍼키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사진가를 응시하거나 사진가의 시선을 받고 있다. 노년에 이른 부인 프리실라의 사진은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THE SADNESS OF MEN>에 나오는 젊고 도발적인 모습과는 또 대비된다. 세월은 흘렀지만, 더욱더 깊어진 눈빛을 한 여인은 삶의 경이와 기적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나에게 증거하고있다.

 

#차 앞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백구의 모습

   사진에 등장하는 개는 흡사 다이도 모리야마의 길위에서 유랑하는 개의 존재같다. 뒤에 '민박'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국이라는 정보를 알 수 없었으리라. 민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만이 잠시 지나가며머무는 곳아닌가. 백구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두고 마을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주인있는 개일 수도, 아니면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유랑하는 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떠나온 자만이 자신과 삶에대해 더 잘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

 

이 사진을 보아서인지 나는 톨스토이가 생애의 말년에 쓴 한 책에서 만난 글에 크게 공감한다. 

 

「삶은 지나간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이다.

죽는 것은 육체뿐 영혼은 영원히 산다.

(…)

악과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만

죽음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186

 

#뉴욕 거리의 울타리 사진, 경계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는 간간이 사진가의 상체 또는 머리의 그림자가 나온다. 사진가는 그만큼 대상과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된다. 뉴욕의 어느 거리로 보이는 한 사진. 어느 집의 철장으로된 울타리의 바깥에는 휠체어에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자고 있다. 하지만 울타리의 안쪽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커다란 개 뒤에서 벤조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이 관찰도 진실과는 무관할 수 있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안과 밖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자의적 구분은 나의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는사람이자 이방인이기에 나의 편견을 발견하고 또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가 내리쬐는 어느 겨울 오후, 사진 속의 여인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단지 햇볕을 쬐다 음악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꾸고있는 것인지 누가 알 것인가.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 사진가는 프레임의 안쪽으로 들어간 자신의 그림자를 담음으로써 이들과 하나의 현장을 이루며, 홈리스로 보이는 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판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존재 그대로를 응시하고 있다.

 

   뉴욕 거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J. D. 샐린저가 만들어낸 한 캐릭터를 떠올린다. 크리스마스 직전, 바로 지금 이맘 때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후 학교를 떠나게는 홀든 콜필드는 펜실베니아주 어느 시골에서 밤기차를 타고 뉴욕의 맨하탄에 내린다. 규정과 속박의 세계로부터 익숙하지만 매여있지 않은 세계, 곧 소외되고 고립된 공간으로 던져진 홀든은 추운 맨하탄 거리를 새로운 세계의 이방인처럼 배회한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나는 어느 한 책방에 쭈그려 앉아 잠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홀든이 메마른 뉴욕의 추위 속에서 지극한 외로움을 느끼며 거리를 배회하던 장면에 이르러 울컥해지고 먹먹했던 적이 있다. 홀든이 안고있던 짐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지만,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떠올리며 헌 책방에 주저앉아 나의 것이기도 했던 홀든의 고독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어쩌면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은 나의 경험처럼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해내는 사진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시장 사진집을 보고

   숲 속의 한 가운데 모여있는 세 개의 흰색 표식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모두 안개 속 아니면 흐린 날의 뿌연 숲 속의 이미지들이다. 사진가의 추억을 떠올리는 표식일까? 사진가는 이 세 장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배열 해 두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찰나의 순간으로 대변되는 방식, 곧 한 장의 사진으로 승부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50년대 후반 사진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The American>의 사진 연결하기(sequencing) 방식을 닮은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근대 사진의 형태가 아니라, 사진의 연결을 통해 사진가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방식 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진가의 안목과 직관만이 사진 배열의 기준이 될 뿐이다.

   세 개의 흰 색 표식이 있는 사진의 앞에는 또 흥미로운 두 장의 사진이 배열되어있다. 글라이더로 보이는 동체의 긴 날개가 화면의 위아래를 가르며 잔디밭에 붙어 서있다. 그 뒤를 잇는 사진은 평범해보이는 수면과 초원의 사진이다. 하지만 수면과 대지를 이루는 경계의 면은 앞 사진의 글라이더의 형태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두 사진에 나오는 소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이미지가 어떤 직관적인 연관성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필립 퍼키스 선생은 무관하지만 지극히 인공적인 이 두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이를 연달아 배열해두었다는 것. 이 사진에 대해 그 이상 내가 말할 수 있을까?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곧 사진가에게 있어 한 사진집을 완성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외부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립 퍼키스의 연결된 사진들은 사진가 개인의 마음 풍경(mind-scape)을 드러내주는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 연속된 전체로서 사진가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주는 자서전적(autobiographical) 작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필립 퍼키스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관되게 흑백 사진을 찍으며, 현상과 인화를 하고 사진을 선별해내었다. 사진을 고르고 고르는 편집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저자의 손을 거친 이 사진집은 이 작업이 바로 필립 퍼키스 자신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

 

* 전시를 본 후 메모

   사진집의 이미지들을 다시 하나 하나 떠올려보고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문학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굳이 비교한다면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나의 편견에 치우친 판단일 수 있겠지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은 톨스토이의 거대한 장편 소설들같이 느껴진다. 반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는 톨스토이가 노년에 쓴 아포리즘 선집 같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이 인간이 살아가며 맛보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 곧 희노애락의 다채로움을, 그리고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게되는 폭넓은 감정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인간의 슬픔>에서 필립 선생은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주해온 자신의 자전적인 삶의 모습을 아우르고 있다. 때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혹은 위트가 담긴 시선으로 견고한 두 다리로 버티며 대상을 탐색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때론 신비스럽기도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어느 자전거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 안타까운 현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에 나오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현장 사진에대한 오마주같기도 하다. 나아가 여기에는 딸의 어릴 때 사진과 성장한 딸이 아이를 낳아 안고 있는 기쁨의 순간도 있으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도 등장한다. 다시말하면 필립 선생의 첫 사진집은 생동하는 한 인간이 경험한 삶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다 담겨있는 듯하다.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침에 새롭게 눈을 뜰 때 만나게 되는 삶의 경이와 같은 느낌의 사진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의 첫 사진집에는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에 나오는 사진들은 전보다도 훨씬 더 절제되어있음을 느낀다. 물론 일부는 첫 번째 사진집에서 보던 연결고리를 놓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며 인생의 겨울을 담담하게 바라보는듯한 시선이 담겨있다. 이전에 보였주었던 호기심과 위트가 담긴 시선이 아니라 사진은 좀더 신비스러움을 주고있다. 인생의 내밀한 깨달음 같은 것이다. 글로 따지면 한 문장이 갖는 밀도와 무게가 더해져있는 그런 짧은 글을 보는 느낌이다. 노사진가가 담담하게 드러내 펼쳐 보이는 원숙한 삶의 정수(精髓)가 이것이리라. 사진가는 대상을 관조하며 이전보다 더 고요한 사진들을 보여주고있다. 마치 무위(無爲)의 자유속에 노니는 듯 하다. 내가 받은 이런 느낌들이 톨스토이가 만년에 집필한 그의 아포리즘과 같다고 느낀 것이다.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그의 아포리즘에서 노자의 무위(無爲)에대해서 언급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인상을 필립 퍼키스의 인화방식과 흑백의 톤, 그리고 절제된 사진의 구성에서 더욱 피부로 느낀다.

   필립 선생의 두 번째 사진집과 톨스토이의 아포리즘은 모두 삶과 죽음의 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사유하는 듯하다. 이 두 거장 모두 삶과 죽음을 두려움과 무지가 아닌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사진집에 나온 모든 사진이 나와 공명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유독 특정한 사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을 것이며, 어느 날에는 다른 사진들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사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립 퍼키스 선생이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셔터를 눌렀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에 공명하는 사진들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특정 사진을 보다가 문득 나의 오래된 기억이나 경험들을 떠올리기도하고,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거나 삶의 경이를 느끼는 것. 그것 이외에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필립 퍼키스 선생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

 

 

 

*두 사진집 관련 문의는 안목출판사 블로그에서...

http://anmocin.blog.me/220564465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