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문학이란, 《창작과비평 – 186호(겨울)》를 읽고

《창작과비평 - 186호(겨울)》를 읽은 감상

 

‘내게 문학이란 무엇일까’

 

예기치 않은 눈이 펄펄 ‘나린’ 날, 이번 겨울에 나와 함께 했던 계간지 《창작과비평》 겨울호(186)를 다시 돌아본다. 온 나라가, 아니 세계가 바이러스로 신경이 곤두서 있다. 문득 진부한 의문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문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계간지의 표지에 정리된 글들의 제목과 주제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모두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문학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불완전성과 부조리함이 없다면 태어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문학은 우리와 사회를 가감없이 비추고 있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조국사태’와 ‘일본의 경제 제제 움직임과 일본 제품 불매’가 우리의 화두였다. 이제는 바이러스 기사 ‘한 방’에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뒤바뀌어 버린 것 같다. 마치 언제 그런 문제가 있었냐는 듯 말이다. 국내 확진자의 동선이 낱낱이 공개되고, 사생활이 드러난다. 중국인들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눈총을 받고, 기피 대상이 되어갔다. 서울의 어느 카페 입구에 “No Chinese”라고 써 놓은 것을 지인이 보았다고 했다. 작년 말에 우리 사회는 “No Japan”을 자랑스럽게 차에 붙이고, 가게 앞에 붙이지 않았던가. 이제는 “노 차이니즈”라니. 물론 극히 일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전염성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팍팍함’을 이유로, 또는 우리만은 ‘살아 남기’ 위해, 곤경에 처한 이들을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더 큰 위험이 닥치지 않겠는가?’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문제는 이 ‘당연시’라는 지점에 있다. 올 겨울에 문예계간지 《창작과비평》 을 처음 만나고, 틈틈이 읽으면서 내게 문학이란 무엇일까를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을 지나 문학과 만나게 된 나에게, 이 진부한 질문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문학이 자리매김하는 자리는 바로 우리 삶에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다’라고 바라보는 곳에 있지 않을까. 아마 문학의 역할이 이런 것이기에, 내가 계간지의 표지를 보며 ‘문학의 존재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함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라는 막연한 물음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에서 동물로서의 인간이 유전자를 나르고 퍼뜨리는 ‘생존 기계’라고 표현한 대목이 떠오른다. 바이러스라는 개체 전체의 전략에 인간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그나마 이 공포도 똑똑한 인간이 앎을 통해 추가된 공포다) 바이러스의 위협에 ‘문학’은 가장 강력한 ‘백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감염된 타자(사람과 다른 동식물을 포함하여)를 격리하거나 배제하는 일을 당연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의 지식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바이러스 집단의 전략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문학적 상상력’일 것이다. ‘문학’은 내가 타인의 시선과 관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해줄 기회를 줄 수 있다. 문학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이 ‘당연한 현상’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상상하고 발견하도록 한다. 이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효용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백신은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