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

라쇼몽 대한 간략한 보고서

 

 

작년에 일본계 미국인 문학비평가이자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를 알게 되어 찬찬히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쿠타니는 미국의 일간지 《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s에서 34년 간(1983-2017) 서평을 담당했는데요, 그녀가 은퇴 후 처음 발표한 정치·문화비평서가 바로 이 책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이하 《진실》로 표기)입니다. 이 책을 읽던 중 알게 된 소설 한 편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입니다. 《진실》의 서론에 해당하는 ‘들어가며’에서 가쿠타니가 이 단편 소설을 언급한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상대주의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톰 울프가 말한 ‘자기중심주의 시대’부터 시작해 자부심 넘치는 셀피(selfie) 시대를 거치며 부상한 나르시시즘 및 주관주의와 정확히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서 모든 게 우리 자신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라쇼몽 효과’가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 같은 대중 소설부터 <디 어페어>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까지 우리 문화에 스며든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이 ‘라쇼몽 효과’가 뭘 의미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쿠타니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라면 류노스케의 「라쇼몽」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가정한 것 같습니다. 제가 소양이 부족한 면도 있지만, 가쿠타니의 글도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언급한 대목만 가지고는 어림짐작만 해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라쇼몽 효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류노스케의 「라쇼몽」을 찾아 읽어보면 되겠죠. 가쿠타니는 과연 이 「라쇼몽」을 자신의 글에서 어떻게, 어떤 맥락에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점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잊고 지내다가, 가끔 ‘라쇼몽 효과’의 의미가 무엇일지만 가끔 떠올렸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여러 글에서 만나게된 ‘라쇼몽’에 대한 언급과 자료들을 모아 ‘라쇼몽 효과’ 의미를 이해해보려 합니다.

 

 

우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을 읽어봤습니다. 10페이지짜리 단편이라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라쇼몽’은 한자어로 읽으면 ‘라생문(羅生門)’에 해당합니다. 어떤 마을 외곽의 폐허가 된 2층 누각의 문이 ‘라생문’이라고 불리는 듯 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곳이기에 동물이 들락거리고, 가난한 백성들이 누각의 나무를 뜯어다 내다팔기도 하고, 시체를 버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비오는 어느 날, ‘화자’가 이 라생문을 지나다가 2층 누각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화자’가 조심스럽게 누각 안을 보니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고, 어느 노파가 횃불에 의지해 시체의 머리털을 뽑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화자’는 노파의 악행에 분노하여 칼을 들고 노파를 위협합니다. 시체의 머리털을 뽑는 이유를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이 물음에 노파는 대답합니다. ‘이 여자 시체는 사람을 속여 뱀 고기를 판 여자로 악행을 저질러 왔던 여자인데, 이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발용으로 팔려고 한다고 말이죠. 결국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배고프고 가난한 ‘화자’는 이 말을 듣고 노파의 옷을 벗겨 달아납니다. 노파의 옷을 팔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가쿠타니가 말한 ‘라쇼몽 효과’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가쿠타니는 《진실》의 3장에서 또 다시 ‘라쇼몽’을 언급합니다.

 

 

톰 울프는 1989년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어느 글에서 이런 상황 전개를 한탄하며, 미국 소설의 전통적 리얼리즘이 사망했다고 애도했다. 그러면서 소설가들이 “(자아의 세계로부터 나와) 이렇게 요동치는, 기이하고, 예측불가능하며, 돼지들이 발을 쿵쿵 구르며 걷는 바로크적인 우리의 나라로 향해 그것을 문학 자산으로 되찾”을 것을 촉구했다. (…) 울프는 기자의 목소리와 관점을 새로이 강조한 1970년대 뉴저널리즘의 영향력 있는 주창자였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선언이 문학계의 많은 이들을 전향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루이스 어드리크, 데이비드 미첼, 돈 드릴로, 줄리언 반스, 척 팔라닉, 길리언 플린, 로런 그로프 같은 작가들은 수십 년 전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포드 매덕스 포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혁신자들이 「라쇼몽」같은 새로운 현실을 포착하고자 개척한 다중시점, 신뢰할 없는 화자, 뒤엉킨 이야기 구성 같은 장치를 여러모로 활용했다.

 

 

이 대목에서 가쿠타니는 「라쇼몽」를 언급하며, ‘다중시점’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을 다시 읽어도 이 ‘다중시점’이란 표현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소설에 다양한 시점이 등장한다면 저처럼 소설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시점의 변화만큼은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을텐데요. 이 다양한 시점이 저에게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다만 소설 속의 노파와 ‘화자’가 각자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하듯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해석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소설의 행간을 읽어 감지해 내야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되더군요.

 

 

다시 가쿠타니가 언급한 대목이 소설과 잘 맞지 않는 듯하여 혼란을 느끼던 중, 이 단편 소설에 대한 ‘작품해설’을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편 소설 「라쇼몽」말고,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줄거리가 사실은 류노스케의 다른 단편 소설 「덤불 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의 배경만 단편 소설 「라쇼몽」에서 가져와 적용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실제로 소설 「덤불 속」에는(이 단편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각자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포스터 출처] By Daiei, (c) 1962 http://entertainment.webshots.com/photo/2011951000055228984dXleQp[dead link] accessed 01-March-2008,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644246

 

그러므로 가쿠타니가 《진실》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며 언급하는 ‘라쇼몽 효과’의 「라쇼몽」이란 작품은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가리킨다고 봐야합니다. 이 소설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영화 <라쇼몽>에서 분명히 여러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영화 <라쇼몽>은 사실 류노스케의 다른 단편 소설 「덤불 속」의 내용이었던 것이죠. 실제 단편 「라쇼몽」이 아니구요. 그렇다면 가쿠타니가 말하는 이 ‘다중시점’의 ‘라쇼몽 효과’는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덤불 속 효과’가 옳은 것이겠죠. 따라서 ‘라쇼몽 효과’라는 표현의 유명세는 사실 단편 소설 「덤불 속」에게 주어져야 마땅합니다.

 

 

퓰리처상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저널리스트 잭 하트(Jack Hart)의 글쓰기 책 《논픽션 쓰기》(정세라 옮김, 유유)에서 저자는 논픽션 글쓰기를 이야기하는데,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의 마지막에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영화로 자주 인용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조차 단 네 명의 시점인물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준다.

 

 

정리해봅니다. 가쿠타니의 《진실》과 잭 하트의 《논픽션 쓰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라쇼몽 효과’는 모두 ‘다중시점’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사실 두 경우 모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를 염두에 두고 언급한 겁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언급한 ‘라쇼몽 효과’의 맥락은 사실 류노스케의 단편 「덤불 속」의 내용에서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실제 단편 소설 「라쇼몽」은 제가 처음 소설을 읽으면서 ‘시점 변화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제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해주었던 것이구요. 한 가지 더 이해하게 된 점은 미국의 문단에서 주로 회자되고 소비되고 있는 작품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실제 「라쇼몽」보다는 ‘다중시점’이란 맥락에 초점을 맞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라는 점입니다.

 

 

‘라쇼몽’관련 자료를 찾다가 한홍구 교수가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역사이야기’ 코너를 연재하며 쓴 글에서 ‘라쇼몽’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한 역사서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이영채·한홍구 지음, 창비, 2020)의 공저자 한홍구 교수라서 더 흥미롭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문학비평가들이나 역사학자가 ‘라쇼몽’을 언급할 때,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지가 궁금했었고, 그 실마리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아래에 ‘라쇼몽’을 언급한 한홍구 교수의 글을 링크해두겠습니다.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수많은라쇼몽 진실을 찾아」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487.html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https://ko.wikipedia.org/wiki/라쇼몽_(1950_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