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관계'의 문제를 재정의하는 시도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이상욱·이영의·김애령·신상규·구본권·김재희·하대청·송은주 지음

[아카넷]

 

AI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경계와 관계의 문제를 재정의하는 시도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 시대의 중심화두가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는 ‘4차 혁명’이라는 표어 아래 미래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와 더불어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 함께 논의되는 것을 본다. 몇 년 전 세계적으로 공개된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승리했다. 알파고는 딥 러닝(deep learning) 기술을 통해 승률을 키워나간 인공지능 기술에 기반했다. 바둑은 규칙이 정해진 게임이며, 이렇게 규칙이 정해진 분야에서 인공지능 기술은 큰 발전을 이루었다. 반면, 빅데이터에 기반하는 딥 러닝 방식을 적용한 인공지능 기술은 집안일하기처럼 규칙이 없는 일에는 무용지물이다. 알파고는 스스로 이 대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파악하거나 스스로 우쭐대지는 못한다. 바로 현재의 인공지능은 딱 거기까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자각’하는 지능이란 개념 자체는 이미 ‘너무나 인간적인’ 요소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시대는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삶의 조건을 인간과 기타 동물 및 환경에 부여한다. 이번에 만나게 된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는 바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국면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국내 저자 8명은 모두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기술이 우리에 주는 영향을 탐색하는 일에 논의의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덟 가지 주제는 어느 주제도 빠짐없이 묵직한 주제와 생각거리들을 던져준다. 저자들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기술 중심의 낙관적 기대와 함께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비판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만들어 나가야 할 담론으로서 포스트휴먼이라는 주제를 이끌어 간다.

 

 

이번 책을 익으면서 ‘포스트휴먼’의 개념에 대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첫 번째 장의 저자 이상욱의 언급에 따르면 ‘휴머니즘’이란, 인간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는 ‘인본주의’로서 근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이란 ‘휴머니즘’의 연결선 상에 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중심이 아닌 인간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새로운 시대에는 인간 중심의 관점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1장의 저자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삶을 새롭게 재발명할 필요가 있다”라고 담론의 방향을 정리하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때론 호기심어린 놀라움으로, 때론 충격으로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상상해볼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포스트휴먼 담론을 통해 개인적으로 주목하게 된 곳은 ‘경계’와 ‘관계’가 머무는 지점이었다.

 

 

 

인간과 기계가 동일한 지점으로 수렴해가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우선 ‘경계’의 문제를 제기한다. 곧 인간으로 대표되는 유기체와 기계, 또는 인간과 기타 동물, 인간과 사이버 존재, 물질과 비물질 등 데카르트 주의로 대변되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의 경직성을 벗어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영혼을 가진 기계였고, 동물은 영혼없는 기계일 뿐이었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떠올렸던 ‘기계’는 우리가 떠올리는 로봇이나 자동기계와 크게 다를바 없는 ‘물리적 신체성’을 가진 존재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휴머니즘은 이 서양중심의 공고한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사이버 존재, 인공지능의 점유는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담론에서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할 기회를 줄 수 있다. 사이보그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간 저자 이영의는 ‘호모 사이보그’의 경우처럼 ‘인간성 상실’보다 오히려 인간 향상과 생존을 위한 진화의 한 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계-인공지능이 인간의 몸에 침투하여, 점점 인간의 신체기능을 대체하고 오히려 향상해나가는 현실에서 이미 인간(혹은 인간다움)과 기계(혹은 인공지능)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 존재 내에서도 우리가 ‘이성’과 ‘감정’이라고 구분지은 개념에 대해서도 보다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제4장에서 소셜로봇이란 키워드로 논의를 이어간 저자 신상규는 안노티오 다마지오라는 연구자를 소개한다. 다마지오는 우리의 ‘신체적 반응이 그 자체로 감정상태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다. 그에게 ‘감정’은 ‘이성’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이 변화에 알맞은 대응전략을 구축하는 수단’일 뿐이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등의 ‘신체적’ 반응은 그 자체로 감정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다마지오는 ‘감정은 신체적이다’라고 표현하며 감정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정리했다.

 

 

이처럼 포스트휴먼 담론에서는 인간과 기계가 기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포스트휴먼이라는 동일한 지점으로 수렴’해간다. 이 관점은 ‘인류세’를 중심으로 논의한 마지막 장(제8장)에서 보다 확장되어 제시되고 있다. 곧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지구적) 환경 사이의 관계 역시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인류세’라는 개념은 최근에 이해하게 되었는데, 바로 우리 인류가 처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표현이다. 저자 송은주는 인류세의 재난에 천재와 인재, 환경-사회적 요인이 불분명하게 서로 얽혀 있음을 언급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물질 세계의 구성요소일 ’이라는 메시지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현장 주변을 방문하고 희생자를 인터뷰한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이 사례 역시 주관과 객관, 과거와 미래, 나와 타자와의 ‘경계’와 거리가 붕괴한 순간을 증언하고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에는 경계를 너머 상호침투적이기 때문에 그 경계는 이미 불분명해지게 된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인류세 관련 사안들에 대해 저자는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과정’이라고 언급했다. 다소 생소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류세와 포스트휴먼되기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류세 논의는 인간과 자연이 합쳐져 공동의 지구 역사를 만드는 행위 주체가 되었다는 점을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경계 허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인간 자체는 “고정되고 닫힌 경계로 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다른 몸들과 상호적으로 영향을 항상 주고 받으며 변형되는 과정에 있는 존재다(250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라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으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개별 인간 하나로 규정될 것이 아니라 주변과 전체와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 인류세에 대한 논의가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는 지점인 것이다.

 

 

 

포스트휴먼 - 인간과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 요청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대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 존재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새로운 위치’를 점하게 된다. 특히 제3장에서 저자 김애령이 제시한 ‘인공자궁’에 대한 논의와 제6장과 제7장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새롭게 유발되는 인간의 새로운 노동조건에 대한 논의는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이 논의는 새로운 환경 조건에서 인간이 처하게 되는 새로운 위치,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혹은 다른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글로벌 생명공학산업이 만들어내는 생체노동시장에 대해 전해주는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사실 충격적이기도 하다. 영화 <구글 베이비>로 대표되는 ‘아기 공장’ 산업은 상업적인 글로벌 대리모 시장을 대변한다. 20세기 초의 농축산과학에서 시작된 생명공학 기술들은 이제 임신과 출산과 관련한 산업에 활발히 활용된다. 그런데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산모와 가족의 출산권인 ‘재생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지만, 이 산업에는 가난한 나라의 대리모가 대부분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자로서 대리모의 지위는 수태에 실패할 경우 건강 상태에 대한 보호나 산후 조리를 적극적으로 받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도 문제다. 아울러 대리모들의 ‘자궁’은 재생산 기술과 노동계약 아래 공적 감시를 받으며 ‘투명’해지게 되었다. 1965년에 미국의 <라이프 Life>지에 등장한 것처럼 산모의 몸 속에 있는 아이는 과학기술을 통해 얼굴과 표정이 확인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의 대리모에게 지급되는 ‘수당’이 이들의 삶을 크게 개선할 수 있지 않느냐는 ‘윤리적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포스트휴먼 사회가 가져오는 새로운 노동구조를 살펴봄으로써 보다 폭넓게 검토할 수 있을 듯하다.

 

 

인공지능의 시대,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수반하는 새로운 노동구조로서 소개되는 마이크로워크 (제7장)와 자동화에 따라 기계의 노동을 보조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 (제6장)는 특히 불안정한 노동구조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나와 다음 세대들을 떠올리며 무엇보다 관심있게 살펴봤던 부분이다.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역시 알고 있을테지만 현재 인공지능 기술, 특히 딥 러닝 기술을 적용하는 인공지능 서비스의 경우, 빅 데이터에 기반하기 때문에 인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한계가 있다. 페이스북, 아마존, 구글 등 디지털 기술에 기반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이런 딥 러닝 방식을 적용한 인공지능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조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바로 소득 불평등을 발판 삼아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되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상을 다시 정리해보자. 딥 러닝 기술은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통해 기술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이 모든 기술과 서비스가 가능해지려면, 기술 유지와 보수과정에 반드시 인간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많은 수가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에 해당하며, 가난한 나라 혹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기꺼이 인공지능 기술에 기반한 콘텐츠를 관리하고, 인공지능을 지원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다. 제7장에서 저자는 이런 일을 마이크로워크라고 소개한다. 이런 노동구조 속에서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소득 격차 현상에도 무감각해지기 쉽다고 지적하고 있다. 추가적인 문제는 이 현상의 연장선으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던 ‘여성들의 돌봄 노동’역시 마이크로워크의 노동구조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러면 여성들의 돌봄 노동(예: 전통적인 가사노동) 역시 극심한 소득불평등 속에서 디지털 기술사회는 유지되는 것이 당연시된다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제6장에서 논의되는 ‘자동화 사회’가 수반하는 새로운 고용구조의 변화양상과 맥을 같이 한다. 제7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대 디지털 기술 기업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 서비스의 이면에는 마이크로워커들의 숨은 노동이 인공지능 서비스를 떠받치는 두 기둥으로서 역할을 한다. 제 6장의 저자는 현재의 자동화기술은 인간의 노동이 기계를 보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자동화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반복작업이 자동화된 까닭에, 인간 노동자들은 이러한 자동화 기계가 최적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혹은 문제가 생겼을 때 재빨리 정상화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듯 자동화 시대의 새로운 산업구조 속에서 인간 노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지위에 놓이게 되며, 자동화 시설과 새로운 ‘관계’에 놓이게 됨을 알 수 있다.

 

 

자동화된 산업구조에서 인간 노동자가 도구화되거나 주변화되는 양상은 사실 인공지능 시대에 낯선 풍경이 아니다. 제4장에서 저자 신상규는 ‘로봇’이라는 개념이 체코의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등장했으며, 로봇이란 단어는 하인, 노예, 고된 일 등을 의미했다고 밝힌다. 따라서 이미 ‘로봇’이란 개념의 탄생은 인간과 로봇(기계)의 관계가 주종관계를 염두에 두고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자동화된 로봇과 인간 노동자의 관계는 초기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역전된 주종관계의 양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다시 말해 인간 노동자가 자동화된 로봇의 최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보조하는 노동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이 양상은 앞서 언급한 마이크로워커들이 위치한 노동구조의 모습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편 인간과 로봇과의 관계는 ‘역전된 주종관계’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소셜로봇에 대해 소개하는 제4장에서 저자는 아이보나 섹스봇과 같이 인간과 새롭게 관계를 맺는 양상을 보여준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맺기에서 저자는 ‘도덕적 지위’라는 잣대로 이 관계를 새롭게 들여다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아이보와 같은 로봇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서, 아이보의 도덕적 지위가 어떤지를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관계’라는 것은 각 시대나 사회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곧 대상에 대해 인간이 갖고 있는 문화적 태도나 인간이 속해있는 사회의 습관에 의해 그 대상의 도덕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컨대, 2020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와 고양이는 애완동물로서 사랑을 받으며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반면 닭은 저자의 표현대로 ‘치킨’이라는 상품으로 보다 더 우리 사회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돼지 역시 예컨대 삼겹살이라는 상징적인 표상으로서 우리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 동물들을 지능 차이나, 제레미 벤담처럼 고통의 유무와 같은 기준 처럼 각 동물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대상들을 달리 대하고, 다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가 이 동물 각각에 대해 맺게되는 다양한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이들이 어떤 존재인가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인간과 동물이 맺게 되는 ‘관계의 맥락’을 통한 동물의 도덕적 지위 결정이란 발상이 인간과 기계, 인간과 로봇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이제 기계에 대한 다양한 새로운 서사, 새로운 은유가 필요한 시점(136면)이라고 독자에게 생각의 환기를 권하는데, 나는 이 지점에서 한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리게 되었다.

 

 

11월의 저문 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개

막걸리와 고추 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꿇듯 큰 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기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이 시는 박노해 시인의 경운기를 보내며라는 시의 일부이다. 화자인 농부는 23년 된 경운기 한대를 고쳐써가며 자녀를 키우고 공부시키며 가족을 건사한 가장이다. 이제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지는 노후된 경운기를 폐차장에 보내기 전에 절을 하며, 대추와 고추 장아찌, 막걸리를 대접하는 농부에게 이 경운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가족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 시에는 농부와 경운기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폐차 직전에 제를 지내며 경물(敬物)하는 농부가 경운기와 맺어온 특별한 관계 혹은 도덕적 지위는 일본 노인들과 아이보와 맺었던 관계와 다를바 없다는 점이다.

 

 

이렇듯 저자는 인간과 기계, 인간과 로봇,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도덕적 지위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가치관과 문화적 삶의 습관과 관련이 있음을 관계론적 접근을 통해 해설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기계질문’, 곧 지능적 기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해 묻는 일이 결국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다’는 통찰이다. 왜냐하면 기계, 로봇, 동물과 같은 대상의 도적적 지위’에 대한 물음은 결국 우리가 이들 대상과 어떤 관계인지를 자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기계질문’은 곧바로 ‘우리’에 관한 질문이며, ‘우리 사회’에 관한 질문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나는 이렇게 간결하고 명료한 통찰이 이번 독서를 통해 매우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이번 독서를 통해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바라보았던 관점을 탈피하여 인간과 그를 둘러싼 모든 조건와 대상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경계’와 ‘관계’라는 키워드로 다시 이해해보고자 했다. 사실 이 두 가지 키워드마져 명확히 구분하여 판단하거나 설명하는 것 자체가 포스트휴먼의 담론과 모순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경계’라는 것은 구분된 어떤 존재들의 만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이 존재들의 ‘관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스트휴먼의 담론은 이처럼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바라보던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양상을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과 기계, 인간과 로봇은 서로의 영역을 이미 침투해 들어가고 있으며, 그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이른바 ‘혼종 (chimera)’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아울러 포스트휴먼의 담론은 기존의 협소하고 경직된 관계 구도에서 외연을 넓힌 새로운 관계를 예비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관계의 구도와 그 맥락을 연결시킬 수 있는 은유와 상상력의 문법이 필요하게 된다. 이 상상력은 인도작가 아미타브 고시가 “인류세의 위기는 상상력의 위기”라고 언급한 것처럼 현재 지구 환경의 위기가 곧 나의 위기임을 자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다. 생태비평가 티모시 모턴이 제안한 ‘초과물’ 개념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담론은 결국 인간과 그 밖의 모든 ‘대상’과의 ‘구분’이 아니라 ‘혼종’ 상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를 정의해나갈 것인지, 그 양상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지를 고민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고민은 우리의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할은 인간과 관계 맺는 모든 피조물과의 새로운 관계맺기, 새로운 공진화에 대한 이해와 준비를 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