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침묵했다》- 요동하는 전후 사회의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천사는 침묵했다

하인리히 (Heinrich Böll) 지음 | 임홍배 옮김 | [창비]

 

 

요동하는 전후 사회의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지금 돌이켜보니 첫째날 오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전쟁 내내 겪은 일보다 힘들었다.(43면)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처음에 한스는 알지 못했지만, 도시에 몰래 들어온 날은 1945년 5월 8일이었다. 이 날은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독일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1985년에 사망한 저자 하인리히 뵐의 유고작이다. 하인리히 뵐은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의 참상을 온 몸으로 겪고, 전시에 탈영하면 총살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수차례 탈영을 감행했다. 그의 인생 역정을 고려하면 한스의 삶을 뒤바꾼 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결코 한스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전쟁에서 입은 외상보다도 한스와 같이 전방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혹은 후방에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입게 된 황폐해진 심리적인 상처, 내상의 단면들을 조명한다. 이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하루 아침에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목격했던 생존자들이다. 역사상 유례없는 경험이었다. 한스가 고통스럽게 떠올린 이 문장은 전후 생존자들이 새롭게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암시한다.

 

 

저자 하인리히 뵐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1949년 이전에 집필되었고, 50년이 다 되어 1992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전후 독일 사회가 입은 상처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소설의 초고를 읽은 편집자의 반응처럼 독일인들은 전후 오랜시간동안 생활의 터진이 완파된 전쟁의 상흔을 직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전쟁터의 참상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스가 탈영 후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마주친 얼굴이 사람이 아닌, 서 있는 석조 천사상이었다는 사실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참상을 간접적이면서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전쟁의 폐허를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는 인간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는 식물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통은 폐허 위에 자라난 풀을 보고 건물이 파괴된 시점을 유추할 있었다. 그것은 식물학의 문제였다.(108면)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인적의 발길이 뜸해지면 어디에서나 풀들이 자라기 시작함을 보여주며 폭격으로 사라진 이들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한스는 뵐의 아바타이다. 저자는 전쟁 전후 겪은 삶의 국면을 소설에 반영했다. 한스가 서점 관리인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상황으로 나오듯 뵐은 전쟁 전에 도서 판매 수습 사원을 잠시 한 적이 있다. 전쟁 직후 출생한 아들이 오래지 않아 사망했던 작가의 경험은 소설 속에서 레기나의 아들이 총알에 희생된 경험으로 되살아 난 듯하다. 목숨을 걸고 탈영을 시도한 것 역시 소설 속 인물인 한스와 작가 하인리히 뵐의 공통점이다. 한스가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에 갑자기 죽기로 결심한 누군가가 나타나 대신 죽음을 맞았다. 저자는 한스처럼 탈영하여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전쟁이 남긴 황폐함의 모습을 문학으로 남겼다. 그 공로로 하인리히 뵐은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또 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시기에 김지하 시인의 구명 운동으로 우리와 인연이 있기도 하다. 구소련에서 추방된 작가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등,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의 풍경들: 저항과 포용

 

소설을 읽으며 주목한 부분은 폐허를 마주하게 된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세계다. 하인리히 뵐은 이들의 내면을 다양한 층위에서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신체의 다양한 감각을 통해 감지되는 세계상을 전한다. 폭격으로 타오른 도시의 불빛이 너무나 강하여 건물 입구의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대목이나, 폐허가 된 도시의 재와 오물 냄새처럼 구체적인 감각을 환기하며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한편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경험을 한 생존자들에게 도시 파괴의 충격은 오히려 일차적인 감각을 마비시키는 압도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6개월 된 아이가 미군이 쏜 총알에 맞아 죽은 사건 앞에서 슬픔조차 느낄 수 없었던 레기나의 모습이나, 창 밖으로 보이는 불타버린 도시의 폐허를 가리기 위해 창문과 커튼을 닫고 어둠 속에서 사는 모습은 결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설은 이렇듯 감각과 무감각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요동하는 생존자들의 분열적인 내면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은 전후 생존자들이 이제부터 익숙해져야만 하는 삶의 필수 조건이었다.

 

 

이런 구도는 세상을 그나마 무덤덤하게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이들의 모습을 대비하며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징집 명령이 담긴 엽서를 받기 전의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병이 되면서 이름을 버린 자의 모습과 대비된다. 곧 한스가 군인이 되기 전, 이름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한스와 군인이 된 후 제복을 입고 한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 자의 분열적인 모습을 병치시켜 바라볼 수 있다. 전시 상황의 군인, 곧 국가의 권위에 순응하는 기계 부품과도 같은 존재, 비인간화되는 상황에 맞서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한스가 탈영한 것도 결국 전쟁에 반대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저항 행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을 겪으며 무감각해져버린 생존자들에게 전후 새롭게 감지되는 감각에 대한 환기는 인간다운 삶으로의 회복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운명처럼 불쑥 나타난 한스의 등장으로 레기나는 잃어버렸던 감각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폐허 속 생존자들이 겪게 되는 분열적인 구도와 이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은 망각과 기억행위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전후 독일 사회의 생존자들에게는 폐허가 된 세계를 회피하고 싶은 집단의 무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무의식과 회피의 결과, 과거 세계에 대한 집단의 망각 현상으로 이어진다. 하인리히 뵐이 이 소설을 집필한 행위는 현실을 마주대하고 집단의 망각에 저항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기억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뵐과 마찬가지로 독일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독일 작가 W.G. 제발트는 자신의 강연을 정리한 공중전과 문학에서 ‘문학의 가능성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다’고 언급했다. 제발트 역시 문학을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로 인식한다. 이 소설은 독일 영토에 가한 연합국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6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사망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발트는 일본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사망했던 희생자의 3배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했는데도, 독일 사회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희생자들을 추도하지 않는 모습에 더 경악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억할 기회마저 포기해버린 듯한 독일 사회, 희생자를 애도하지 못하는 독일 사회의 무능력에 대한 저항으로 문학을 선택한 셈이다. 그런 제발트이기에 하인리히 뵐의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만이 유일하게 다시 폐허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본 모두를 사로잡았던 그 경악의 깊이에 근접하는 표상을 전해준다” 라고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레기나가 집안을 청소한는 장면이었다. 레기나가 한스와 결혼을 약속한 후 ‘질서와 청결함을 추구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은 대대적인 폭격과 아이의 죽음으로 마비된 감각과 피폐해진 삶에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였다. 벽에서 석회가루가 계속 떨어지는 상황과 목욕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한스와의 만남과 결합을 계기로 그녀가 잊고 있던, 익숙하던 것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레기나가 잊고 있던 감각을 회복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삶을 소망하는 몸부림으로도 읽혔다. 한편 레기나는 7시간 넘게 청소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바닥의 얼룩과 끊임없이 벽에서 석회가루가 떨어지는 상황에 좌절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 나치즘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고 싶은 충동,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은 몸부림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레기나는 바닥의 얼룩이 ‘악성 발진처럼 자꾸만 돋아날 것’임을 알고 있던 것처럼, 나치가 구축해놓은 공고한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레기나의 청소행위는 전쟁 전의 정상적인 삶, 인간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생존자들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사회의 모순들

 

소설을 막 읽기 시작했을 때는 완전히 파괴된 도시, 숱한 가족을 잃은 공간에서 생존자들이 그저 덤덤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 같아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도무지 슬퍼할 수조차 없어.(75면), “아이가 부러울 지경이야.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냐(76면). 아이가 죽었지만 슬픔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레기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스가 나타난 이후 레기나의 삶에 차차 변화가 찾아온다. 한스와 함께하기로 약속하면서 비로소 울게 되었던 것이다. 레기나가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마비되고 상실되었던 인간다운 삶의 징후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레기나는 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 그리고 한스는 성당의 사제로부터 미사에 사용할 포도주를 받아온 저녁에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다. 포도주는 예수가 흘린 피의 상징이자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두 사람이 앞으로 삶을 함께 나누겠다는 피의 서약이기도 하다. 남은 여생을 함께 하기로 다짐한 레기나는 행복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는다. 레기나를 안고 있던 한스가 레기나의 눈물을 맛보고 그제서야 눈물이 ‘땀처럼 짜고 따뜻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결합을 계기로 생존자에게도 여전히 살아가야 할 삶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으로서 혼자 삶을 구하는 일조차 힘겨운 전후 독일의 폐허 속에서 한스가 레기나에게 청혼을 한다는 것은 소설의 한 사건으로서만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결합은 분열된 세계를 극복하는 저항 행위임과 동시에 전쟁 전에 누리던 일상의 삶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아닐까. 이 사건은 내게 소설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큰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한스의 독백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158면)

 

청혼하기로 결심한 일은 한스가 앞으로 평생 레기나를 보면서, ‘매일 매일, 수천 번 주어지는 숙제’처럼 수많은 식사를 해결해야만 하는 책임을 지는 일을 의미했다. 이 책임을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든 암시장이든 어떤 일이든지 감내하며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랑(긍정)하고자 하는 운명애의 철학을 떠올리게 해준다. 한스와 레기나의 결합은 전쟁의 참상, 폐허에 굴복하지 않고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다.

 

 

소설에서 레기나와 한스가 서로에게 끌리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를 몇 가지 주목해볼 수 있다. 하나는 마멀레이드와 같은 음식이었다. 한스가 징집 명령에 응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 날이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음식은 빵과 버터, 쿠키와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였다. 빵과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는 한스를 만난 후 그를 위해 레기나가 준비해준 ‘커피와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으로 이어진다. 레기나는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값나가는 물건인 카메라를 팔아 한스를 위해 신분증을 구해온다. 신분증을 받은 한스는 외출하여 되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 돈을 구하여 복귀한 한스를 보면서 레기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을 한스에게 건넨다. 마멀레이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레기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삶이 이어지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한스와 레기나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요소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레기나가 한스에게 갑자기 반말 했을 때, 한스는 ‘이루말할 수 없는 뭉클함’을 느낀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내왔던 사람처럼말이다. 레기나의 반말은 무감각의 세계를 깨뜨려 한스를 정상적인 감각의 세계로 되돌리는 망치 같은 역할을 해준다. 전쟁 전에 익숙하던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로서 말이다. 오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전쟁 동안 타지에서 일하고 돌아온 레기나가 지붕 처마의 물받이 홈통이 내는 소리를 들은 이야기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리하지 않은 채 처마에 6년 간 매달려 있던 홈통은 도시에 가해진 대대적인 폭격에도 여전히 그대로 였던 것이다. 레기나는 전쟁 전의 일상을 이 홈통이 내는 소리를 통해 기억해낸다. 레기나의 반말과 마멀레이드는 폐허에 나겨진 두 사람에게 인간다운 감각을 환기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장치로 볼 수 있겠다.

 

 

다만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사랑과 결합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희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후 독일 사회에는 생존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 또한 가로놓여있었다. 곰페르츠 부인이 죽은 이후 그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피셔 박사와 시아버지 곰페르츠가 보인 행보는 전후 독일 사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대변한다. 곰페르츠 부인의 장례식에서 두 사람은 검은 진창에 넘어져 있던 대리석 천사상을 밟고 위로 올라간다. 두 사람의 무게로 천사상은 진창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 장면은 도시가 폭격으로 초토화 된 모습, 교회와 전체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부정, 두 남자로 대표되는 이들의 과거 행적을 모두 목격했을 천사상이 가라앉으며 과거의 진실이 망각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와 같은 이들은 과거가 빨리 망각되기를 바라는 자들일 것이다. 문학은 이에 대한 저항행위로서의 기능할 수 있음을 고민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레기나와 한스가 폐허 속에서 잊고 있던 감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나치 동조 세력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레기나는 자신의 피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려 하는데, 수혈의 대상이 다름아닌 피셔 박사의 딸이라는 설정 역시 또 다른 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시대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생존자들에게 짐을 지우지만, 나치 동조 세력들에게 과거는 그대로 잊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전후 독일 사회 역시 여러 가지 가능성과 모순이 공존하는 사회임을 경고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전쟁의 모습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W.G. 제발트가 말한 ‘시대의 증언’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한 셈이다. 무엇보다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에서 마비와 인간적인 감각, 전쟁의 비인간화와 인간다움의 가능성 사이를 요동하는 전후 독일 사회의 분열적인 세계를 묘사했다. 한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느끼는 고통은 감각의 환기, 감각적 묘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 난다. 폐허에 대한 감각적 묘사는 생존자들의 기억을 관통하는 매질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결합을 통해 분열적인 세계를 극복하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두 인물은 자신들에게 던져진 삶을 그대로 끌어안음을 보여줌으로써 전후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이 모습은 전후 불가항력적으로 경악의 깊이에 압도당한 생존자들의 마비상태를 다시 인간다운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의 몸무게로 인해 진창 속으로 가라앉는 대리석 천사상처럼 시대의 상처와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 남을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이 주로 전쟁 후 떠돌게 된 독일계 유대인들의 삶을 따라가며 이들에게 깊이 패인 전쟁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이민자들의 독일인 버전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다만 뵐의 소설에 나오는 독일인들은 이민자들의 인물들이 마주한 상황처럼 고향을 벗어난 이들은 아니었다. 고향을 상실한 상황이라기 보다는 검은 진창 위에 넘어진 천사상이 점점 가라 앉던 모습처럼, 상처를 입고 무감각해진 모습으로 삶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상실한 독일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제발트가 전후 희생된 독일인들에 대해서 애도 하지 않는 독일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은 자신의 소설에서 적극적으로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하려는 의도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두 작품 모두 전쟁의 참상보다는 전후 사회를 직시하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내면 풍경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인리히 뵐이 전쟁 직후 써내려나간 이 소설은 작가가 전후 독일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과 우려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 전해주는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