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길 위에 피어난 자신의 별을 찾아간 여정’ <단테>

 

‘유랑길 위에 피어난 자신의 별을 찾아간 여정’

《단테》

: 내세에서 현세로, 궁극의 구원을 향한 여행

박상진 지음 | [아르테]

우리 살아가는 길 반 고비에

나는 어느 어두운 숲속에 서 있었네.

곧은 길이 사라져버렸기에.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구나.

(《신곡》 「지옥」 1곡 1-6행)

단테가 지나갔음직한 길을 700년이 지나 어느 학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때로는 머뭇거리며 따라간다. 나는 책을 덮고 그가 남긴 발자국을 눈으로 쫓는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쳐 이 문장을 만났다. 표현이 지닌 무게를 새삼 실감한다. 단테 알리기에리. 이탈리아의 중부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그는 오늘날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 그리고 괴테와 함께 4대 시성으로 불리는 시인이자 철학자, 정치가였다. 인생의 정점에 오른 36세의 전도 유망한 젊은 정치가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을 낳아준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유랑의 길 위에서 써내려간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위에 인용한 싯구의 앞부분은 인생의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의 신세가 된 한 인간의 황망하고 암담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선 일탈을 겪은 한 인간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운명의 장난인지를 두려움과 함께 토로했다.

단테가 남긴 대부분의 작품은 길 위에서 씌여졌다. 문학연구자인 저자는 단테가 지나간 길을 따라 나섰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순례자와 같이 단테가 지나갔을 법한 장소와 그 길을 그리고 길에서 만난 모든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가 쳐다보았을 법한 풍경과 밤하늘을 바라보고 그의 모습과 생각을 상상해본다. 저자는 단테의 작품과 자신의 현실 사이를 하나의 직물처럼 촘촘하게 짜넣는다. 단테가 태어난 피렌체가 직물 산업으로 유명했음을 상기해주듯이 말이다. 저자는 작품의 중요도에 비해 인간 단테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도 시인의 작품을 통해 그가 두려움과 일말의 희망, 소중했던 기억에 의지하여 써내려갔을 문장들을 정성껏 꺼내놓는다. 그러므로 단테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로서 시인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정보를 저자가 지나간 길을 따라가며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저자가 몇 문장으로 정리한 다음 부분이 시인의 면모를 종합해보고 상상해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단테는 뛰어난 상상력과 시적 언어의 감각을 지닌 작가였고, 합리적 사고와 역사의식을 소유한 지식인이었다. 또한 세속적 연애감정과 영원한 사랑의 가치를 연결할 줄 아는 비범한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이자, 세상의 정의를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세우고자 했던 실천가였다.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지칠 줄 모르는 관심으로 관찰하여 재현했고, 이치를 통찰하여 체계적 이해에 도달했다. 그는 인간에 대해 품은 한없는 애정과 연민을 고도로 절제된 언어로 담아냈다.(215면)

단테에 대한 저자의 평가다. 물론 저자가 표현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테의 작품을 직접 감상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정리한 단테의 행적을 따라가며 한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를 그려낼 수는 있었다. 단테보다 많이 앞선 시인 호메로스가 그려낸 문학 세계 속에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등장한다. 단테처럼 오디세우스 역시 오랜 세월 집을 떠나 유랑했다. 트로이 전쟁과 지중해 주변의 섬들을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20년을 모험과 유랑으로 떠돌았지만 결국 가족과 일상이 있는 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반면, 19년을 길 위에서 보냈던 단테는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생의 후반에 이르러 안정된 기반 위에 있지 못했던 단테에게 ‘구원’의 문제는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이런 상황에서 단테의 작품들은 현실에 기반하여 현실의 언어로 길 위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사의 신과 달리 인간은 가사자(可死者) 혹은 필멸하는 존재다. 그리고 크고 작지만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의 전환점을 겪는다. 그것이 작은 상처를 입는 신체의 변화일 수도 있고,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삶 또는 신변의 변화일 수도 있으며, 죽음과 같은 인생사의 마침표일 수도 있다. 단테는 인생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자신을 낳아준 도시로부터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삶에 가장 큰 분수령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추방 전과 추방 후로 명료하게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추방 직전, 단테는 피렌체의 최고위원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 이렇게 도시에서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추방 전의 삶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한 인간에게 있어 삶의 정점에 이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권력 다툼에서 패한 자는 내리막길만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에겐 일방통행로였던 것이다. 교황권을 지지하는 궬피파에 속해있었음에도, 단테는 탐욕스러운 교황들의 행보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신념이 있는 자’는 흔히 부러지거나 꺾이기 쉬운 존재로 기록되었고,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추방 후 단테의 삶은 어둠 속에서 별 빛 하나에 의지한 채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삶으로 이어졌다. 단테는 《신곡》에서 ‘어두운 숲’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노래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단테의 추방 후의 삶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망명의 길 위에서 위대한 문학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삶의 정점에 오르면서 벼려두었던 단테의 지성은 자기 성찰의 힘을 통해,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별’로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테는 내리막길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걸었기 때문일까. 단테의 언어는 주도면밀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오롯이 현실을 담고 있다. 《신곡》에서 단테는 지옥, 연옥, 천국을 순례하며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며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현실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단테는 객지에서 단순히 자신의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신곡》을 썼을까. 이것이 부수적인 효과일 수는 있겠지만, 단테의 글쓰기 행위는 보다 더 의도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로 보인다. 모든 것을 잃고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던 불안정한 삶 속에서 글쓰기는 오로지 자신의 삶을 의지하고 지탱해주는 길 위의 동반자가 아니었을까. 길 위에서 지속된 단테의 글쓰기는 스스로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실존적인 실천 행위였음을 생각해본다.

생전에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무죄를 인정받지 못해서일까. 단테는 사후에도 피렌체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단테를 품었지만 결국 추방해버렸던 피렌처는 단테의 사후 그의 유해를 찾으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700년 동안 단테의 마지막을 지키고 보듬었던 라벤나는 그의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다. 단테의 영혼은 자신을 환대했던 라벤나에서 마침내 안식을 찾았을 것 같다. 아니면 그 곳에서도 여전히 길 위에서 유랑하고 있을까? 우리는 시인이 남긴 토스카나 지방의 속어를 통해, 그가 남긴 목소리를 듣는다. 지금도 전 세계의 어디에선가, 어느 길 위에서 수많은 언어로, 누군가의 입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귀로 정성껏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영혼이 사후 700년이 되도록 여전히 우리에게 와 닿고 있음을 느낀다. 내년인 2021년은 단테의 사후 7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외로 여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나는 잠시나마 저자의 어께 너머로 단테의 삶을 따라가며 여행해볼 수 있었다.

단편적인 인용구를 통해서이지만 저자가 꺼내준 《신곡》의 문장들에서 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들, 그 민낯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로 상징되는 사랑과 아름다움, 그리고 철학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인간의 죄악을 비롯한 삶의 모습들,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삶의 국면을 분주히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지점은 단테의 스승 라티니가 해준 말이었다. ‘너만의 별’을 찾아 기준으로 삼고, 이를 따라가라는 메시지. 평범한 인간인 우리들은 각자의 별을 찾아 나아가는 길이 또 하나의 고통과 근심의 길임을 안다. 하지만 단테가 남긴 시와 흔적, 여행지에서 저자의 상상력과 우연히 마주친 사건들,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발견의 과정이 이 책에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또한 각자 나름대로 지속될 것임을 예감한다. ‘탄생과 종말, 죽음이 공존하는 곳… (…) 나는 대상을 카메라에 담아 가져온다. 그리고 내 마음은 거기에 내려놓는다.’ 묘지가 있는 어느 사원을 방문한 저자가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결혼식 안내 문구를 보고 새로운 삶의 시작도 떠올리는 대목이다. 우리 각자의 길 위에서 인간은 삶의 마지막과 시작이 공존함을 목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테의 스승이 해준 말이 더 기억에 남았다. 700년 전 한 시인의 삶이 오롯이 담긴 《신곡》은 단순히 과장된 내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단테가 《신곡》 의「지옥」,「연옥」,「천국」 각 편의 마지막 문장에 새기듯 써넣은 ‘별 stella’을 통해 여전히 시인과 접속한다.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는 오래된 시인이다."- (11면)

"(단테는) 최후의 중세 시인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 시인"

: 프리드리히 엥겔스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나눠진다.

: T.S. 엘리엇
- (22면)

"피에솔레 언덕에서 바라보는 피렌체는 ‘꽃피는‘, ‘번성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이름답게 꽃잎처럼 펼쳐져 있다."- (16면)

"그에게 구원이란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원만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167면)

"너의 별을 따라간다면, 영광의 항구에 실패 없이 도달하리."

: 스승 라티니가 단테에게 해준 조언- (211면)

"별은 그에게 희망이며 길이다. 그의 삶은 별을 향해 나아가는 항해였다."- (2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