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살자'에 관한 이야기

괴로움에 지쳐버린 한 청년이 시 중심가에 있는 호텔의 40층 난간에 올라가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인근에서 달려온 경찰이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곳은 몇 피트 아래의 이웃 빌딩 지붕 위였다. 안전하게 돌아오라는 온갖 탄원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이윽고 그곳 교구의 신부가 나타나 그와 대면하게 되었다.

"생각해보거라, 내 아들아. 너를 사랑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보거라."

신부는 사랑이 담뿍 답긴 목소리로 자살 희망자에게 말했다. 청년이 대답했다.

"그들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뛰어내리겠어요."

"안되, 내 아들아, 멈춰라!"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로 신부가 다급히 외쳤다.

"너를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해 보라."

"나를 사랑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뛰어내리겠어요."

신부가 다시 애원했다.

"그러면 오직 너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을 생각해 보거라."

청년이 물었다.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이라구요? 그들이 누굽니까?"

그러자 신부가 소리질렀다.

"뛰어내려! 이 유태인 새끼, 뛰어내리란 말이다!"

  오쇼 라즈니쉬의 < 배꼽 >(박경준 엮음) 중에서

오쇼 라즈니쉬의 말 : 사랑은 이렇게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 사랑의 온갖 말들은 단지 피상적인 것이었다. 모든 관용의 말 저 밑 깊은 곳에는 편협함이 들어 있다. 관용이란 말부터가 추한 것이 아닐까? 사랑이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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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완전한 까닭에 이 자살자 이야기의 신부이자 때로는 청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내일의 나는 좀더 나은 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늘 부단히

나자신과 만나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교세라 기업의 회장 이나모리 가즈오가 담담하게 말하듯, 인생의 목적이란 선한 마음을 쌓는 것, 혹은

영혼을 닦는 것이라야 한다. 지식은 고작 몇 권의 책으로부터 알게된 단편에 불과하고, 스스로를 기만하기 쉽다. 나는 이러 이러한 것도 안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지식은 스스로를 더욱 편협하게 만들기 쉽다. 무엇을 전공했고, 연봉을 얼마를 받고, 내가 모르는 여러 가지 경제학

용어를 말하고, 어느 어느 대기업에서 일했다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한다. 내가 오로지 관심있는 것은 내가 이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