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황인찬 시인과의 인터뷰를 읽고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를 읽고

창작과비평 187(봄호) ‘작가조명

오연경(문학평론가) 지음 | [창비]

 

 

 

 

이번 호에서 황인찬 시인을 인터뷰한 글을 읽으면서 새롭게 눈여겨 본 것은 시인 역시 자신이 쓰는 시의 ‘정체성을 묻는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최근에 내 시를 봐도 그렇고 다른 시를 봐도 그렇고 ‘시의 화자를 시인과 분리할 수 있나’ ‘이게 시인가, 에세이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시인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고민인가 싶기도하다. 황인찬 시인을 만나면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 등단한 지 10년이 된 시인이 바라보는 ‘시의 정체성’에 그동안 어떤 변화라도 생겨났는지도 물어보고 싶다.

 

 

인터뷰 기사 처음부터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나온다. 시인 역시 ‘좋은’과 ‘’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써내려가는 시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과연 이러한 형용사와 부사가 제한하는 한계에 대해 시인은 어떤 이유로 고민하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는 동안, 어느 새 시인은 ‘리듬’이나 ‘이미지’와 같은 장치보다는 ‘쓰기’행위 하나만 남게 된다, 라고 말한다. 내게는 시인이 시를 대함에 있어 ‘좋은’과 ‘잘’이라는 형용사와 부사를 이제는 지우고, 시의 본질만을 보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러한 고민도 역시 등단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분투의 흔적으로 보인다. ‘쓰기’라는 행위만 남는 지점이 시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될 것 같다.

 

 

이번 인터뷰기사를 읽고 황인찬 시인을 새로 알게 된 무지한 독자이지만, 새로운 앎 또한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이기도 하다. 오인경 평론가도 지적하듯이 시를 읽고 바로 파악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평론가 역시 이상과 김수영의 시를 예로 들며 ‘난해함’의 문제를 제기했다. 황인찬의 시가 ‘어렵지 않은 단어와 단순한 구문을 사용하지만, 의미가 단순하지 않고 잘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시인의 시는 난해한 시가 주는 ‘소통 불능’의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다고 했다. 독자의 정서적 몰입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독자를 고려할 때 황인찬 시인의 시가 지니는 독특함과 매력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황인찬 시인에게 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점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오인경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은 ‘평이하면서도 풍부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작을 위해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시작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점이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인지도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된 이유는 시인이 본인의 시에 대해 ‘어떤 효과가 있다면 아주 다행’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이상이나 김수영 시인이라면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을 것 같다. 이 ‘다행’이라는 표현에는 어쩌면 독자를 너무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궁금해졌다. 최근의 시에서 많이 보이는 ‘화자’와 거의 일치하는 ‘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인의 ‘독자에 대한 배려’가 혹시 독자에게 주어진 ‘자유의 영역’에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주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의미의 파악이 쉽지 않은 시인의 시를 많은 독자가 읽고 있다는 점은 이것이 나의 기우임을 말해준다.

 

 

문득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는 시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이 이러이러한 시를 쓰게 된 배경과 시인의 마음가짐, 혹은 시적 상황을 상상해보려는 노력 없이 나는 ‘이해’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시 한 구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곱씹어 본 적도 없이 시가 어렵다고 했던 것은 무엇보다 나의 문제인 탓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시를 읽을 때 직관과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결론은 ‘나는 왜 시에 가 닿으려는 노력도 안하면서 시가 어렵다고 하는가’였다. 리뷰를 쓰다 보니 어쩌다 나의 고백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황인찬 시인과 오연경 평론가가 언급하는 것 처럼 난해함과 소통 불능의 문제는 시가 안고 가는 본질적인 딜레마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시인이란 뭘까, 라는 의문도 불쑥 솟아 오른다. 인터뷰 기사에 나온 단어들을 이용해서 나름의 정리를 해보면, 시인이란 시대의 한 가운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동시에 당대의 집단 무의식과의 싸움을 밤새 계속 해나가는 야곱과도 같은 이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누가 이기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나마 시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시를 읽는 일’이란 어쩌면 내 삶의 ‘놀라움’을 배우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감수성, 삶에 대한 감수성을 예민하게 하고, 이를 몸에 새기는 일이라고 말이다. 반대로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예민해진 감수성을 몸에 새기고, 난해함과 소통 불능을 넘어설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자전거를 배우고 수영을 배우듯이 말이다.

[독서일기] 앎은 철학의 출발점이다

앎은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각의 싸움》에서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작과 함께 철학이 다다른 반대편의 극한으로 니체를 소개한다. 신화의 언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로 만물을 설명하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보통명사로 자유롭게 비판하고 따져 묻기 시작하며 철학이 탄생되었다. 이런 변화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고유명사로 세계를 설명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지적 갈증을 자각했다는 것, 그리고 ‘감히 알려고 시도한’ 순간이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발생한 철학이 이르게 된 곳의 경계를 니체의 철학으로 설정한다. 철학의 본령인 ‘자유로운 비판과 따져 묻기’의 대상을 모든 철학 자체에 적용하여 회의하고 질문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니체는 우리가 삶의 일부처럼 여겼던 ‘도덕이 애초부터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며, 언제든 새 도덕이 만들어 질 수 있다(62)고 주장한다. 도덕의 상대성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니체는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 각자가 도덕적 주체로서 ‘각자의 도덕을 만들고 자신의 윤리를 만들라(63)고 주문하며, 이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니체는 최초로 도덕을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도덕비판’의 임무를 부여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이,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가치와 추구하던 의미의 진공상태를 니힐리즘으로 표현한다. 우리 손에 붙들고 있던 의미와 가치가 근거 없음을 ‘영원회귀’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제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동안의 도덕과 사회 규범 및 가치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목적지를 지정해주고 있었다면(예-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니체는 이 목적지를 우리 각자가 정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칸트가 언급한 의무론적 윤리학의 맥락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곧 행동의 규칙만 제시하며, 규칙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니체는 각자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택할 방식으로 행동하라(72)라고 주문한다. 매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각자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이 어떠한 것이더라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만의 윤리를 만들고 이에 따르는 삶이다.

 

이 지점에서 떠올린 소설의 한 대목이 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이 제2차 대전 직후 쓴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 의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도시 쾰른을 배경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으로 각자 의지할 가족 없이 홀로 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서로 가까워진다.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사라져버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삶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천사는 침묵했다》, p158). 이 지점은 《생각의 싸움》에서 저자가 니체의 철학을 소개한 지점과 연결을 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이 대목은 니체가 물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응답처럼 보였다. 삶의 기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기존에 있던 삶의 규범과 도덕은 이제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두 남녀의 삶에 대한 의지만이 새로운 규범이며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바로 이 두 사람 자신들이었다.

 

 

생각의 싸움》의 1장에서는 철학의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의 양 끝을 보여주었다면, 2장에서는 이 경계의 사이 어딘가에서, ‘이성’, 곧 로고스로 대변되는 앎의 과정이 어떻게 서양의 근대 철학을 시작한 철학자들에게 나타났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확실한 앎이란 가능한가, 그리고 이 앎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의 싸움’을 벌였던 이들이다. 이런 근대 철학과 공통적인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던 것은 중세를 지배해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근대 철학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합리적 의심을 기반으로 공고하던 기존의 철학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국면 역시 만물을 가능케 한 요소를 ‘물’이라고 본 탈레스에게 왜 그러한지 비판적으로 따져 물었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근대 철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따져 물었던’ 것이다.

 

2장의 처음에 소개된 베이컨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경험적 지식,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며 귀납법의 전통을 세웠다. 세계에 대한 지식들로부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을 찾아내고 다시 이 규칙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베이컨과의 충돌이 불가피 했으며, 이 대결 구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기관》이었다.

 

베이컨은 지식을 얻는 과정을 방해하는 우상 네 가지를 언급했다. 이는 학문의 선입견이자 편견이기도 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종족의 본래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동굴의 우상은 각각의 개인이 갇힌 틀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오류를 지칭하며, 시장의 우상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생겨나는 문제들을 설명해준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허구적인 권위에 기대는 인간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베이컨은 이런 다양한 우상들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새롭고 유용한 앎을 얻고 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음을 믿었던 철학자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대륙의 합리론 전통을 마련한 철학자다. 베이컨(경험론)이 근대 철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마련한 사람이라면, 데카르트(합리론)는 확실한 앎의 토대를 세운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데카르트는 이 목표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수학과 과학에 주목했다. 반면 감각을 통한 앎을 확실한 지식의 토대에서 배제했다. 이 부분은 앎에 이르는 과정에서 베이컨과 다른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실마리를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찾는다. 곧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바로 이것이 첫 번째 확실한 앎이 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확실한 나의 존재를 발명해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흐름은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흄은 데카르트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경험론의 전통에 있다. 이를테면 추론이라는 실험적 방법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시도에 적용한 것이다. 확실한 앎의 토대를 마련한 데카르트와 달리 흄은 세계에 대한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이란 원리적으로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성의 우월성에 입각한 ‘확실한 앎’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이를 깨부수었기 때문에 흄은 ‘회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험론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검은 스완의 사례처럼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귀납추리의 진술이 잠정적, 확률적, 개연적으로만 참이며, 필연적으로 참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여, 세계 인식에 대한 귀납적 추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저자는 흄의 관심이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서 시작하여, 어떤 토대 위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공동체의 윤리로 나아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 일부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했다.

 

데카르트와 흄의 철할 일부를 소개해 놓은 이 책에서도 앎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상반된 입장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합리론(이성론)과 경험론이라는 근대 유럽의 두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이들의 철학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밀레토스 학파(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의 본령(비판의 자유와 따져 묻기)을 결합하여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한 사례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칸트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칸트는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와 헤겔에 이르는 이성론의 계보에 있다. 따라서 칸트는 철학의 큰 두 흐름을 단순히 절충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성론의 입장에서 이성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칸트가 두 근대 서양철학의 흐름을 통합했던 것은 무엇보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인식의 기원’부터 고민했던 것이다.

 

이성론에서의 앎(지식)은 선험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의 판단은 주어 안에 술어의 내용이 포함된 ‘분석 명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확실성은 보장받을 수 있으나 앎의 확장성에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경험론에서의 앎은 주어 안에 있지 않은 특성이나 성질이 첨가되어 술어에 나타나는 ‘종합 명제’로 제시된다. 이것은 감각 경험을 통한 수용으로 이루어진 앎이므로 확장성을 지니지만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흄은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을 주장할 수 없으며(곧 확실한 앎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관념들의 다발인 상상에는 ‘그릇’이 없다고 언급했다. 반면 칸트는 앎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외부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각자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각자의 인식이 있으며, 이 인식의 활동에는 흄과 달리 각자의 ‘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 틀을 통해 들어온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틀’이란 ‘인식의 프리즘’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프리즘을 통한 가시광선의 색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 따르면 ‘(사)물자체’는 우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이 ‘틀’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내 안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틀이 모두 동일하지 않으면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떠오른다. 칸트 역시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인정했다. 각자의 내부에 있는 저마다의 틀은 각자에게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표상이 저마다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만 칸트의 ‘인식’은 보편 타당해야한다고 보았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 개인 안에서 얻어지는 인식의 확실성에 대한 부분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지만 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추가적인 감상과 정리)

 

이번 독서에서는 무엇보다 데카르트로 시작하여 흄,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철학이 낯설고 아직 그 철학의 지형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아직 이들의 삶 일부와 불과 몇 페이지에 소개된 철학을 맛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다만 여러 철학자들의 면모를 좀 더 알게 되고, 내게 조금 더 익숙하거나 흥미를 가진 대상과 연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가령 흄의 도덕 철학에 대한 관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스피노자의 문제의식과도 연결이 되며 견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흄이 제시한 인상과 관념의 개념, 그리고 관념 연합의 작동 메커니즘은 칸트의 ‘표상’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칸트가 언급한 ‘제시’와 ‘재현’에 대한 이해는 회화와 사진 예술로도 확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표상을 받아들이는 감성과 표상을 다듬고 이를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지성의 요소는 현대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해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또한 저자는 칸트의 입장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생물학의 시도를 짧게나마 소개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또 흄의 경우 자연주의자로서의 면모에 대한 설명은 아직 모호하게 다가왔다. 원리상 인간이 확실한 앎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 흄이 ‘자연 전체가 한결같다’고 주장한 앎은 어떻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에 관한 내용은 추가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한편 저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언급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앎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펴본 진짜 삶과 우리가 (그렇다고) 확신하는 삶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우리는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흄이 제시한 관념 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 곧 상상의 세계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실체가 없는 ‘무대 없는 연극’같은 관념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어디까지 둘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처럼 이번 독서에서는 철학이란 모든 앎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식으로서의 앎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든 현상과 대상을 ‘이해’하는 앎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체는 이 과정을 바로 네가 하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씨앗은 인식의 확실성이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는 데카르트의 초상화 - 제2장에서 보여주는 이성에 입각하여 벌이는 '앎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플라스틱을 새롭게 바라보기

플라스틱 중독 시대 탈출하기」를 읽고


창작과비평 187(봄호) ‘특집’ –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김기홍 지음 | [창비]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플라스틱을 새롭게 바라보기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은 한국 사회의 변화 가지는 배달 업무가 상당히 늘어났다는 점이다. 배달물량이 늘어났다는 것은 배달에 필요한 포장 재료 또한 증가했다는 의미다. 포장 재료에는 종이를 사용한 박스도 많지만, 플라스틱 제품도 많이 사용된다. 최근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사용과 비닐봉지 사용, 미세먼지 증가와 관련한 문제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한층 플라스틱 제품에 의존하게 같다. 김기홍 교수의 플라스틱 중독 시대 탈출하기 우선 눈길이 이유는 최근 배달물량이 증가하여 일회용 제품이 더욱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포장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사용량이 2015 기준 세계 2위라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2015 예상된 2020 수치는 1인당 67.41킬로그램으로 역시 세계 2위이다. 포장용 플라스틱뿐만 아니라 1인당 전체 플라스틱 사용량으로도 한국이 세계 최대 수준이다. 1인당 비닐봉지 사용량은 연간 460(2017 기준), 한국인 전체 사용량 235억개는 한반도를 70퍼센트 뒤덮을 있는 양이며,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 33억개를 늘어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도달 가능하다.(62면)

 

 

매주 박스 가득 생겨나는 플라스틱 재활용품을 내다놓으면서 놀라곤 하는데, 김기홍 교수가 대목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 단적으로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사용되었을 2900 켤레의 비닐장갑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제품은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뤄낸 이면에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도 놓치지 말고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탄소경제와 플라스틱 사용 환경과의 관련성을 설명한 대목과 연관지어볼 , 저자가 언급한 자료는 우리가 얼마나 석유 기반 탄소민주주의 제공하는 편리함과 무한 경제성장 순응하고 안주해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라고 있다. 북극과 갈라파고스 군도, 알프스와 같은 산악지대 뿐만 아니라 포획되는 어류와 수돗물, 시판되는 소금에서도 발견되는 미세플라스틱 문제에 우리가 특히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이유다.

 

 

저자가 탄소경제를 언급하면서, 석탄과 대비되는 석유 기반 경제의 정치성 주목한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같은 탄소 기반 경제이긴 하지만, 석탄에 기반한 경제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개입이 가능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반면 석유 기반 경제에서는 송유관과 해상운송로의 통제와 함께 노동자들의 정치적 개입이 차단되게 되었다. 석탄 기반 경제와는 다른 차원으로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서 근본적으로 배제되는 노동자 소외 불가피해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1979 마거릿 대처 정권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영국에 처음 시험 도입하는 과정과 연결지을 있다. 과정에서 탄광노조가 와해되고 탄광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석탄 기반 경제에서 석유 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적 개입이 무력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지점에서 권력화된 기업들이 석탄이 아닌 석유를 구태여선택한 이유를 다시금 점검해볼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자가 석유 기반 경제의 특징으로 언급한 개인주의적이고 탈정치적 이념이 체화되었다는 것은 개인화된 기업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무한 경제 성장을 욕망할 있는, 기업중심 세계가 되었다는 점을 시사할 것이다.

 

 

문제가 특히 중대한 이유는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중심이 기업 권력이 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과거의 국가 권력보다 사유화된 기업 권력이 우위에 서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전세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빈부격차의 심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를 보다 근본적으로 배제시킨 개인화된 기업이 에너지 자원을 독점할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석유에너지 자원 확보와 수송문제를 둘러싼 송유관, 해상운송로의 통제 문제는 국가간 무력 충돌과 전쟁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난민 증가 문제와 전세계 테러리즘의 증가 문제와도 맥을 같이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비판할 이런 문제들과 결부되어 이미 많이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플라스틱과 관련한 이번 특집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플라스틱을 걱정하는 사이, 여기에 얽힌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축으로하여 시리아의 난민 문제와 유럽 등지에서 증가하고 있는 테러리즘과도 연결지을 있게 되었다. 플라스틱 문제와 난민 테러리즘의 문제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저자는 이런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석유 기반 경제와 결부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우리가 접하는 플라스틱 문제는 분명히 환경만의 문제는 분명히 아니라는 인식도 확장하여 생각해볼 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번 특집에서 다룬 플라스틱 문제는 보다 지구적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저자는 과도하게 사용되는 플라스틱이 탄소경제 전반, 그리고 기후위기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 있음을 말하며, 무제한적 성장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탈성장담론을 제시한다. 나아가 실천 방법으로서 경제보다 인간을 더욱 중시하는 라뚜슈의 탈성장 선순환체계 영국 저널리스트 루시 시글의 플라스틱 발자국 줄이기 위한 여덟가지 원칙을 정리해 두었다. 이러한 방법들은 사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방안들이다. 하지만, 앞서 저자가 제시한 대한민국의 플라스틱 사용량 자료를 본다면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과 실천이 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우리가 행동해야할 때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탈성장에 근거한 공동체의 복원만이 플라스틱 문화를 급진적으로 전환 있는 기회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다만 독자로서는 현재 거론되고 있는 대안이 탈성장담론 밖에 없는지 아니면 다른 논의들도 거론되어 것인지 밝히지 않은 점은 궁금증으로 남는다. 또한 탈성장 위해 구체적인 방안들은 무엇일지가 독자로서 새롭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현재 지구인은 무한성장만이 답이다라는 경제구조에 적응하고 이를 신조로 받아들여 왔다. 이런 경제 구조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처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것인가, 그리고 개인화된 권력 기업의 독주를 어떻게 견제하며 함께 생존을 위한 노력을 끌어낼 있을지가 중요한 문제다. 어쩌면 문제는 지구인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생존 기회와 직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플라스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은 우리의 생존 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있는 출발점이자 반드시 필요한 숙제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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