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을 처음 읽다

 

 

《죄와 벌》 (2020)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독서일기] (소설을 읽은 인상 외에 주요 줄거리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문학이 아직 생소하지만 작년에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박형규 옮김, 문학동네]를 읽고 뿌듯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소설가로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톨스토이가 중년에 쓴 이 소설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양상을 폭넓게 담고 있었다. 특히 결혼을 중심으로 한 가족과 친인척의 범주 속에서 발생하는 삶의 모순들과 농노제 문제를 포함한 계급갈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의 대문호로 언급되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 이 안나카레니나를 읽고 ‘예술작품으로 완전무결하다’고 까지 격찬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소설 전체를 상당히 인상깊게 읽었는데, 지인 한 명은 소설 중간에 톨스토이의 잔소리 같은 부분이 많아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이런 기억이 있었기에 토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어떨까하고 한동안 궁금했었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죄와 이 새로 출간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읽어보게 되었다.

 

 

독서일기를 쓰는 오늘까지 죄와 1·2권을 모두 읽고, 1권 1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 번 읽고 받은 인상은,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카레니나를 읽고 평한 표현(‘예술작품으로 완전무결하다’)이 오히려 죄와 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하는 점이었다. 러시아 대문호들의 두 작품을 읽은 인상만을 비교하면(내 독서 경력이 짧기에 매우 주관적이고 한정적인 비교다),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는 ‘이야기로 들려주는 사회학 연구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은 폭풍이 휘몰아치듯 정신없이 전개되는 한 편의 범죄 심리 드라마였다.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까지 거의 힘이 빠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죄와 은 개인적인 기준으로 보면 주말에 모든 약속을 잡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후, 지나간 시즌의 드라마를 한 방에 몰아쳐서 보는 드라마 같은 작품이다.

 

 

길지 않은 독서 경험이지만 이렇게 몰아치듯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혹은 이렇게 읽었던) 책들이 몇 권이 있다. 우선 첫 번째가 연암 박지원 선생의 완역판 열하일기 [김혈조 옮김, 돌베개]이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밤새 읽고 회사에서 졸게 만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이제 ‘이런 짓’은 다시 하지 않는다. 체력이 되지 않아 후폭풍을 감당하기란 이제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두 번째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이다. 이 책은 젊었을 때 읽었다면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을 책이다. 삶이 더 이상 만만치 않다는 자각이 지나간 뒤에 만나게 된 책이기에, 어떤 배경지식 보다는 내 삶의 경험치로 읽은 소설이다. 이 책 역시 처음에 우연히 읽게 되었지만 ‘이 책 정말 물건이네’라는 강한 느낌을 받으며 밤새 읽었다. 다음 세 번째 책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송무 옮김, 민음사]였다.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구성된 이 소설은 실제로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서머싯 몸이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40대 중반에 발표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달과 6펜스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두 소설 모두 어느 한 면으로는 ‘자유’ 혹은 ‘자유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소설 모두 젊은 시절에 읽었다면 이렇게 밤을 새면서 하루만에 읽어낼 만큼 나와 공명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회가 부과하는 규범과 속박 속에서 ‘자유인’의 조건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내게 던져준 소설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죄와 이 있다. 내가 몰아치듯 읽었던 네 번째 책이다. 나는 이 소설의 어디에 그렇게 끌렸던 것일까. 이 책은 한편으로 범죄 추리 소설같은 구도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죄를 지은 주인공 로쟈(라스콜리니코프)의 내밀한 심리 묘사가 독자에게 공개된다. 예심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와의 치열한 심리 대결 또한 흥미롭고 놀라운 대목이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소설 속에서 이렇게 녹여 내었는가다. 물론 이 점만이 도스토옙스키의 대문호로서의 장점은 아닐 것이다. 천천히 재독을 하면서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속에 배치해둔 섬세한 장치들을 재발견하고 음미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톨스토이의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을 비교할 때, 유사점이 있다. 부활의 남자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여자 주인공 카츄샤의 구도와 죄와 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구도가 유사한 것이다. 네흘류도프와 라스콜리니코프는 모두 죄를 짓는 인물로 등장하고, 재판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그리고 이 남자 등장인물들이 사랑했던/사랑하게 되는 카츄사와 소냐는 범죄의 대상이 된 충격과 가난이 결합된 이유로 유곽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구도의 유사성에 주목을 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무엇보다 네흘류도프와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가 규범으로 정해 놓은 선을 넘어버린 ‘범죄자’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런 모티브의 설정은 두 대문호의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성 자체가 악하다고 규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빈곤’과 같은 사회적 조건 및 배경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부활 죄와 모두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 이들을 따르며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카츄사와 소냐의 존재로 주인공들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 역시 공통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톨스토이의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 중 하나가 ‘죽음’ 혹은 ‘죽음에의 공포’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 예를 들어 허먼 멜빌의 모비 에서 중간 중간 드러나듯 ‘모비 딕’이라는 이 특이한 향유고래의 ‘흰색’이 주는 공포감과 마찬가지로, 사방이 흰 눈으로 뒤덮인 벌판에서 톨스토이가 실제로 느꼈던 ‘백색공포’의 경험은 곧바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포감이다. 이 ‘죽음’과 관련한 주제는 죄와 에서 여러 등장 인물들의 다채로운 죽음의 순간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전당포집 노파와 나이 어린 젊은 동생이 로쟈에 의해 도끼로 살해된다(여기 까지의 내용은 책소개에 공개되어 있으므로 공개하겠다). 또 어떤 인물은 가난에 찌들고 술에 절은 절망의 상태에서 마차에 치여 죽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권총으로 자살하기도 한다. 이 처럼 소설에는 다양한 죽음의 순간들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로쟈가 지인의 죽음 직후 그 집을 나오면서 아이러니하게 ‘강렬한 생명의 느낌’은 받는 대목은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정치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사형되기 직전에 사면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직접 ‘인지하고 예상된 죽음’ 앞에서 죽음을 직감하고,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었기에 써 내려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이 강렬한 죽음-삶의 경계감은 도스토옙스키만의 작가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정리해보면,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는 한편의 사회학적 소설이라고 한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은 한편의 범죄 심리 드라마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톨스토이처럼 표면적으로 혹은 설명을 통해 작가의 문제의식이 수면 밖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상황 설정과 등장 인물 사이의 대화를 통해 수면 아래에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독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그 메시지를 재발견하고 추출하여 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제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으므로, 작가가 남겨 놓은 보다 풍부한 의미들을 보다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거대한 근현대사를 살아 낸 한 집안의 ‘작은 역사’ - 황석영의《철도원 삼대》

 

 

거대한 근현대사를 살아 집안의 작은 역사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창비, 2020)

 

 

 

소설가 황석영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장편소설 손님을 통해서 였다. 실제 있었던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중심 줄기로 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가족의 아픔이 그려진 소설로 기억한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과 함께 내가 속한 이 사회, 내 자리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황석영 작가의 이력 역시 소설 속에서 고난을 받았던 인물들을 많이 닮았다고 느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만주 장춘에서 태어난 작가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베트남전에서, 그리고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직접 몸소 체험했다. 나아가 정치적인 문제로 독일과 미국 등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귀국하여 방북사건과 관련하여7년간 수감되기도 했으며,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을 떠돌기도 했다. 작가는 대한민국이 마주했던 거대한 운명이 만들어낸 또 한 명의 디아스포라이기도 했다. 고교 재학 당시 단편소설로 문단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50여년 간 한국 문단의 대들보로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이번에 만난 철도원 삼대(가제본)는 작가가 처음 구상에서 집필까지 30년에 걸쳐 이루어진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책의 일부를 발췌하여 마련된 가제본을 읽었기에 소설의 결말은 아직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소설 역시 손님처럼 이 땅에서 지난 10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한 집안이 겪는 ‘작은 현대사’를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은 25년 간 공장노동자로 일해온 해고 노동자 이진오가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한강 주변의 발전소 공장 건물의 굴뚝 위에서 농성중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노조 소속으로 공장주 측의 분할매각 처리 과정에서 해고되었던 노동자로 보인다. 50대 초반인 이진오는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주장하며 45 미터 상공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설은 다시 과거로 ‘플래시 백’되며 과거로 배경을 옮기는데, 시간적으로는 한일합방 이전의 시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이진오의 큰할아버지 이백만과 할아버지 이일철, 아버지 이지산, 이렇게 삼대가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철길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씨 집안 3대가 겪는 일들은 어떠 식으로든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앞당겼다고 이야기되기도 하는 ‘철도’라는 상징적인 대상을 중심으로 엮이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른다. 소설에서 큰할아버지 이백만이 손자 이지산에게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거다.(가제본 59면)라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소설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우리가 믿어왔던 철도 신화 뒤에 가려진 구체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소설을 읽으며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다.

 

소설은 이 땅의 역사가 품게 된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드러낸다. ‘철도원 삼대’의 일대인 이백만의 시대엔 한일합방 이전부터 경인선과 경부선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이미 개통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한일 합방 이후에는 호남선과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어 일본의 중국진출을 위한 사회기반 시설이 마련되었다. 일본 세력이 주변국을 식민화 하는 과정에서 소설은 이 땅에 살던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을 구체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우선 철도 건설을 둘러싸고, 철도 주변의 부지가 수탈되어 수백만 명이 땅을 빼앗겼다. 집 뿐만 아니라, 삼림, 텃밭, 심지어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뺏겼다. 철도 건설 사업 초기에 대한 제국 정부의 고위직 벼슬아치들이 중역이었던 토건회사 마저 점차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선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 한테서도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아가 이들은 농가의 소와 말을 강제로 징발하고, 닭과 돼지 등을 강제로 탈취하는가 하면, 장정들은 강제로 동원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 땅의 농어촌 사회가 붕괴된 연원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농부와 어부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자녀들이 대를 이어 나가지 못했던 배경에는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라가 있을 때에도 그리고 나라를 잃어도 당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모습이자, 일제 식민세력에 의해, 그리고 토착 왜구 세력에 의해 그저 무기력한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모습이다. 물론 이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살아야만 했다. 거대한 시대의 물줄기 한 가운데에 이들 삼대 가족이 있었다. 소설은 이들 가족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이들 각자는 삶의 방편들을 마련하느라 발버둥을 쳤다. 누구는 점원 보조 일을 배우거나 선반 다루는 일을 배우고, 또 다른 이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이진오의 작은 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기도 했다.

 

이 땅에 ‘철도’가 갖는 상징성은 단순한 근대화의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진오의 큰할아버지 이백만은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수백만 명의 삶을 파괴하면서 만들어 놓은 철도가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철도원자리를 얻었던 것이다. 맹렬한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거대한 쇳덩어리는 누군가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 철도원 삼대에겐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흔하지 않은 기회를 잡았다. “우리는 그래두 운이 좋았다네(71면)라고 말하던 식당 주인 민십장의 말은 철도원 삼대도 동의했을 것이다. 이렇게 철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철도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모티프다. 소설은 어느새 21세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와 한강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굴뚝 위로 전환되어 진행된다. 해방 후 한국 전쟁을 겪은 이 사회는 사회 복구가 시작되고,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은 “쌀보다 돈이 필요한 시대(164면)가 되어버렸다. 평범한 이들은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모이면서 수많은 사회의 구성원들은 도시 노동자로 편입되었다. 소설 속의 해고 노동자 이진오가 새로운 산업사회의 ‘철도’에 해당하는 공장노동자의 자리를 찾게 된 배경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잘못된 단추를 꿰어 맞추었던 한국 사회는 새로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목격한다. 공장주들은 외국으로 공장을 옮겨가며 위장 파산하며 노동자를 해고하기도 하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여공들에게 엄청난 노동 강도를 일상적으로 강요하며 언어폭력 등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진오는 공장노동자로 25년 넘게 열심히 일해왔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닌(43면) 곳에서 100일 넘게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농성을 벌인다. 이진오의 아내 역시 대형 마트 계산원으로 교대근무를 한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한 집안의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추적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철도가 담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는 후기 산업사회에 편입된 이진오의 가족이 처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산업사회는 이씨 집안의 후손이 엮이게 되는 새로운 ‘철도’의 모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철도, 그리고 이 땅에 살면서도 자신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은 후기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유랑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씨 집안 가족이 영등포에 있던 버드나무 집에서 살 당시, 3·1운동이 있던 시기 전후로 겪었던 대홍수를 피하고자 버드나무 위에 대피할 공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후손인 이진오 역시 생존을 위해 굴뚝 위로 올라간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구체적인 모습들은 달라도 우리 삶의 근본적인 양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진오의 굴뚝 농성은 바로 우리의 삶의 조건과 모습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의 일부만 읽었기에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소설 손님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철도원 삼대역시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이 땅을 관통하는 역사 속에서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소설에서 펼쳐 놓았다. 시간적으로 앞뒤를 오가며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이들의 ‘작은 역사’를 들려주며 치밀하게 소설을 구성했다. 대한민국 근현대 사회 속을 헤쳐 나가는 한 집안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이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실의 처음과 끝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하는 막막함과 함께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진오는 왜 굴뚝 위로 올라가야만 했는가? 그 대답은 각자의 소설 읽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소설은 한 집안 4대에 걸친 이야기로부터 이 질문과 관련한 기원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이미 선조들의 삶에서 이미 심어진 씨앗이자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것을 다시 확인케한다. 개개인의 삶은 시대와 장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설은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는 최소한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오며 우리의 존재를 마련해준 부모와 조부모 세대들, 그리고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들 역시 풍부하게 담고 있다.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물으며 다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존재하는가? - 《생각의 싸움》 김재인

《생각의 싸움》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나는 존재하는가?

: 파르메니데스와 에피쿠로스를 중심으로

 

 

세 살 즈음의 나와 초등학생의 나,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나와 지난주에 지인과 함께 찍은 이미지에서 내 모습을 찾아본다. 지난주에 ‘기록된’ 내 모습을 제외한 사진들은 이제 오히려 낯설다. 나는 이들 네 종류의 이미지 속에 있는 인물을 모두 ‘나’라고 인식한다. 공통점은 모두 시간이 흘러 ‘과거’의 나라는 점뿐이다. 나는 이 이미지들에서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무슨 근거로 모두 같은 ‘나’라고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고대 철학자들도 이와 같은 물음을 던졌던 모양이다. 기원전 6세기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학자다. 《생각의 싸움》은 파르메니데스의 ‘있음’, ‘존재’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개념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남겨졌던 사진 속의 네 인물이 바로 ‘나’인지 아닌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책에서는 영어의 ‘is'에 해당하는 표현의 세 가지 용법/개념을 소개한다. 우선 주어와 서술어의 대상이 동일함을 보여주는 ’술어적 용법‘과 주어가 존재함을 말하는 ’존재적 용법‘, 그리고 ’옳다/그르다‘를 판정하고 있는 ’진리적 용법‘의 세 용법을 소개한다(181). 동양 문명에 속한 우리는 언어의 세 가지 기능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지만, 서양에서는 이 세 용법이 항상 함께 고려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된 대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참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랍인들에게 이 세 가지 용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이 용법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변화를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달리 말하면 어느 ‘존재’라는 대상은 생성과 소멸을 겪거나 흔들리지 않고, 완결되고 온전해야 한다(182). 따라서 이 대상에 변화가 생긴다면 희랍인들은 이를 ‘존재’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있지 않다’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희랍인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해 보이는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없다’라는 개념은 ‘무(無)’의 개념으로 이어져, ‘있다’와 ‘있지 않다’ 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184). 이 개념은 나중에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에서 고입한 빈 공간(void)의 개념(320)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 보면, 40년이 넘도록 키가 크고 외모가 달라진 사진 속의 인물은 ‘나’라는 동일 인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지시대명사는 어려움 없이 사진 속의 네 인물을 곧바로 가리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 속의 인물이 ‘나’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외형적으로 변화를 겪는 어떤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언어로 진술 불가능한 사태라고까지 인식한다(183). 사진 속의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면, 나는 태어난 상태에서 변함없이 그대로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엘레아학파에 속하며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이 제기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역설에까지 이른다. 언어, 곧 논리만으로 상황을 설명하면 모순이 없지만, 현실에서 관찰되는 현상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188). 지금의 관점에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문제는 궤변이나 다름없지만, 파르메니데스는 경험 세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논리학자였다. 아마도 엘레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언어 혹은 논리에 우선적으로 얽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아직 2,500년 전의 고대 문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 같다. 아직 영원불멸인 신들의 세계가 고유명사라는 ‘언어’로도 사용되고 있었다면, 고대 희랍인들에게 불변하는 세계는 곧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동안 사용되던 고유명사로는 감각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힘들어지며 이들이 충돌하기 시작했음을 자각한 고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건일 수 있겠다.

 

이 ‘있고 없음’의 존재론 문제는 후대의 철학자들을 계속 괴롭히게 되는 문제였다. 파르메니데스가 보기에 존재한다는 것에는 생성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었다(182).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방식을 적용하여 ‘있음 그 자체’인 이데아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곧 현실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현상들’이며, 이 현상들에 공통된 어떤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아라고 하면서 변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를 변하는 현상들과 구분해 놓았던 것이다(193).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논리(언어)와 현상과의 충돌문제는 나중에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런 시도는 유물론의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라는 표현 속에 이들이 하고자 했던 의도가 잘 드러난다(320). 원자론에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를 상정하고, 이 원자들이 우주 전체를 이룬다고 설명한다(320).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는 생성과 변화를 겪지 않는다’라고 했던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는 부단히 변하며, 원자가 모임을 달리하여 존재를 구성할 뿐 존재의 특성은 원자가 그대로 지니고 있다(321)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부단히 변화하는 대상도 원자들의 수준에서는 불변하는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 따라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의하면, 네 장의 사진 속에서 내가 지목한 인물이 모두 ‘나’임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비록 키가 크는 등 외모에 변화를 겪었지만, 원자적인 관점에서 나는 여전히 ‘동일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파르메니데스가 경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여 감각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는 감각에 의존하여 세상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 점이 대비된다. 다만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두 사람 모두 원자의 존재와 허공(void)을 인정하고 도입했다(320)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원자들의 운동 양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기계적인 수직낙하 운동만을 하므로 원자들끼리의 충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결정론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남기고 있으며, 나아가 근대의 과학을 지배했던 결정론적인 고전 역학의 맥락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의 운동에 ‘경로의 이탈’이라고 하는 추가적인 ‘자유도’를 인정하는데(322), 이 작은 차이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자들에 충돌의 여지를 주었다는 것은 고전 물리학에서 현대 물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큰 역할을 했던 확률통계에 기반한 역학의 관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은 변화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존재하는 것은 운동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면 에피쿠로스는 현상의 변화는 인정하되, 원자 개념을 도입하여 존재가 불변함을 설명할 수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는 네 장의 사진에 나오는 각기 다른 시절의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동일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반면 에피쿠로스의 관점에서는 내가 존재하며, 네 장의 사진 속에 나오는 인물이 모두 변함없는 ‘나’란 존재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원자의 이탈(클리나멘)’이라는 ‘자유’ 요소를 도입했는데(322), 이것이 비결정론적 시각, 그리고 자유의지의 문제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이 클리나멘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도 설명해보려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 부분은 ‘자유’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에피쿠로스와 일면 유사한 면(그리고 경험론자라는 관점에서도 유사한)이 있는 스피노자와도 좀 더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스피노자는 애초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334). 대신 스피노자는 앎을 통해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은 현대 과학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데, 윤리와 법에서는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335). 자유의지의 문제는 앞으로 공부를 해나가며 관심 있게 생각해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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