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를 읽고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장 지글러(Jeon Ziegler) 지음 | 유영미 옮김 | [갈라파고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올 가을에 발표된 노벨평화상은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에게 주어졌다. 이 조직은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의 관련조직으로, 1963년에 창설되어 기아와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인도주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수상은 ‘굶주림을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분쟁지역에서 평화의 조건을 마련’한 공로로 결정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제조직의 존재와 활동은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배고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배고픔이란 단어를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가져보았을지 모른다. 이런 의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일까 자문해본다. 역사 속에서 찬란했던 문명을 일군 아프리카와 남미의 고대 왕국이 오늘날 굶주린 아이들로 넘쳐나는 곳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약속한 물질적 풍요는 왜 지금도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1명 씩 굶어 죽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장 지글러의 저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이러한 물음들을 나에게 던졌주었고, 책을 읽으며 나만의 답을 찾고자 했다.

장 지글러는 스위스 출생의 제네바 교수로 사회학자이자 기아문제 전문가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유엔의 WFP(세계식량계획)에서 조사 및 자문 활동을 하며 기아로 고통받는 전 세계의 아이들과 만나고 이 현장을 목격했다. 이 책을 쓴 이후에는 유엔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도 활동했다.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에는 사막화 방지 협약에 소속되어 지구의 사막화 방지 활동에도 참여하는 중이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유엔 기구에서 일하는 아빠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결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독자가 접근하기 쉬우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들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저자는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대를 이어 고착화된 불평등에 의문을 품었을 것 같다. 소들에게 주는 곡물 사료는 남아도는데 인간은 왜 굶주려야 할까? 무고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생존의 위기에 처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현실이 과연 정의로운 세계일까? 저자는 스위스인이면서 스위스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문제를 곧바로 비판하기도하고, 유럽인이면서도 유럽을 ‘식민지 약탈자’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 세계 현장을 누비며 목격한 인류의 ‘삶의 단면’이 고스란히 저자의 문제의식을 통해 이 책에 진지하게 때로는 도발적일 정도로 솔직하게 담겨있다.

이 책의 원저가 출판된 해는 1999년이고,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이 2007년이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기아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계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단서나, 끊이지 않는 테러와 난민의 증가는 인간에만 주목해봐도 삶의 조건이 더 나아졌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특히 저자의 언급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세계인구의 7분의 1에 달하는 8억 5천 만 명이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분명히 지구의 일정 인구는 더욱 가혹한 생존조건 속에 처해있다. 올해 전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것은 기본적인 생존 여건 속에서 살지 못했던 이들이 팬데믹 이후, 보다 어려운 생존 여건으로 밀려났음을 암시한다. 많은 이들이 관심과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장 지글러의 책은 우리가 회피하고 외면하며 추상으로만 머물던 ‘기아’문제를 독자의 손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모습과 질감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얼마나 심각한 부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지구에서 그토록 많은 (인간에 의한) 비극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아이의 얼굴이 담긴 표지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이 책에 담긴 진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가 저항감을 느꼈던 점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지금 당장 나와 무관해보이는 불편한 진실을 왜 알아야 할까? 장 지글러의 책을 읽으며 줄곧 이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인간은 배양접시의 미생물이 아니다

장 지글러는 기아가 순수하게 문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북한의 사례처럼 기아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국가 테러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또 네슬레의 사례처럼 일개 국제 기업이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어, 굶주리는 아이들을 담보로 기업의 경제적 이윤을 보호하는데 기아를 이용하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CIA와 같은 권력기관이 타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쿠데타를 유도하고 내정 간섭을 하도록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기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가야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주체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토마스 맬서스를 지목한다.

18세기 말 영국의 성직자인 맬서스는 단순한 수학을 분별없이 적용하여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맬서스는 인구수가 가난과 기아같은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조절될 수 있다는 ‘자연도태설’을 주장했다.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25년 마다 그 수가 두배로 성장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적으로 증가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세계 인구가 생존 환경의 여러 조건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절된다는 것을 말했다. 곧 질병과 배고픔, 그밖의 환경적인 제약에 의해 인구수가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고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크게 공감을 얻었다. 맬서스가 한 주장의 이면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이 주장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생존하는 인구집단에 속한 관점에서 도태되는 인구 집단의 고통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이론은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으로 기능했다. 유럽의 백인우월주의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담긴 이론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이 이론이 보여준 영향력은 실제로 엄청났다. 이 이론의 기저를 이루는 시각은 인간을 마치 시험실에서 배양하는 미생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의도로 배양접시 속에서 그 수가 조절되는 미생물이 결코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던 1789년에 영국에서는 성직자였던 맬서스가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맬서스의 이론은 인류가 인간다움을 지킬 기회에서 한층 멀어지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이론에 동의하는 자본가 및 권력자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에 정당성을 인정해준 셈이었다. 인간을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게 된 현실을 외면하고, 이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맬서스의 ‘자연도태설’이 자본가와 권력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준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북미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금욕적인 도덕관에 기반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업인들의 제한없는 부의 창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심리적인 불편함을 덜어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데에 주목했다. 기업가들이 신의 소명과 섭리 개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근면 성실한’ 신자이자 자본가들이 기업활동을 통한 부의 창출과 축적 행위를 신의 축복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이것은 북미의 기업인들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 획득한 부는 신의 섭리에 의해 그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부유해진 자본가들은 수익의 10분의 1 혹은 그 이상을 기꺼이 교회에 내놓았을 것이다.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말이다.

맬서스의 이론 역시 자본 증식에만 눈이 먼 거대기업가들의 책임과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적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역할과도 일면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생각해볼만한 점은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적 해석의 실질적인 수혜자들이 시대를 넘어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 권력과 정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에게 이 두 가지 이론은 매우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고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분명히 지구에는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수 있는 식량이 충분히 있다고 한다. 심지어 120억 명까지도 먹여 살릴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남는 식량을 공평하고 고르게 나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에 있었다. 소말리아의 사례처럼 소수의 군벌 세력이 사람들의 식량과 부를 가로채어 독점하거나, 브라질의 금융과두제에 속한 이들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알면서도 무감각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생존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자본 및 정치 권력의 무감증은 맬서스와 동조자들이 지니고 있던 인종차별적,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이들에게 당장 내일의 삶을 기약하기 힘든 10만 여명의 운명은 추상에 불과했다. 지금도 선진국의 소들은 넘쳐나는 곡물로 배를 채우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당연하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책을 읽고나서 든 생각은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이 언제나 피지배층의 삶을 손안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팽창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만 보아도 이름과 모습을 달리 해 왔을 뿐 여전히 피지배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자본 권력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구도를 만들어 세계를 장악했고,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이윤을 얻기 위한 ‘자유시장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지구환경 및 생명의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 생태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해왔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양산해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를 이어 물려주는 빈곤과 기아, 테러리즘과 환경 난민을 포함한 제반 문제는 결국 자본과 권력을 지닌 세력이 만들어 낸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들은 결코 신의 결정이나 신탁에 의해 주어진 운명도, 혹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곧 힘을 가진 소수 혹은 집단이 기획한 일들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혹은 국제통화기금, 시카고 곡물거래소나 월가의 금융자본가들 같이 시대와 지역별로 다른 이름과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집단에 결탁하여 이들의 손발이 되고 이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소말리아의 군벌과 같은 정치 권력이 이들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이 기관들 자체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관들의 권력자들이 보여주는 판단, 그리고 이들의 행보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전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으면 해결할 수 있는 자들이다. 자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존중과 관심 없이 ‘이윤극대화’라는 한 가지 원칙에만 충실한 이들의 처신을 문제삼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에서 개별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은 이렇게 거미줄처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세계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인간성의 위기에 도전을 받는 모든 현안들이 서로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건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글로벌화, 공기업 민영화, 불평등,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난민 발생, 도시와 농촌 사회의 격차 증가, 도시인구 빈민화, 그리고 우리가 매일 관찰하는 도시의 젠트리피케에션 마저도 이 모두가 누군가의 이윤극대화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의 패키지 기획의 결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으로 세계 은행 총재의 자리에서 사임한 김용 전 총재의 사례를 보아도, 이 기관들이 자본 권력의 이익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 전체에서 빛을 발하는 장 지글러의 통찰은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은 이해하기 쉽고 가벼운 대화체 형식으로 쓰여 있지만 저자가 전달하는 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에게 물었던 질문은 ‘우리가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왜 알아야 할까?’였다. 나름의 이유를 찾아본다면, 우선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학교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날마다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관한 진실은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은 전 인류가 처해있는 인간의 조건 및 생태계 모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우리의 무지로 인한 책임 회피를 ‘당연시’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굶주림과 관련한 문제는 복합적인 문제의 한 가지 단면일 뿐이다. 조금만 따저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곧 기아문제는 우리가 빈곤의 문제, 보건 및 위생 문제, 그리고 인권 문제 그리고 생태계 및 환경문제 등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단계를 넘어 다양한 현상들을 보다 큰 시각에서, 하나의 복합적인 양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영양섭취, 기아 문제는 결국 일상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이고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지구적인 규모의 사회정치적 권력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제대로 안다는 것, 또는 최소한 알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은 자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켜내기 위한 출발점이며, 결국 나를 돌보고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린 이 불편한 진실들을 알아야 한다. 알고자 노력하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저자인 장 지글러는 세계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목격한 진실을 간결하게 이 책에 담았다. 당장 다음날의 생존을 기약하기 힘든 아이들을 수없이 보았겠지만, 저자는 마지막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최근에 카뮈의 소설 《페스트 La Peste》를 읽었는데, 소설 속의 주요 인물이 나눈 대화 한 구절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의사에게 ‘당신에게 페스트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그건 끝없는 패배’라고 답했다. 불가항력의 페스트 앞에 인간은 어김없이 패배하는 존재다. 의사는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진실로 투쟁을 중단할 이유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우리의 존엄을 위협하는 빈곤과 기아 문제 역시 소설 속의 페스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라는 ‘페스트’가 자본가 및 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여전히 수많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좌절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장 지글러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23면) 그리고 이 희망을 위한 출발점은 바로 이 공감(진실을 아는 일)과 연대(손을 내미는 일)로부터 시작할 것 같다. 장 지글러의 한 마디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자에게 외치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인용문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23면)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

(37면)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 시장 가격의 본질에 대해 (75면)

"지금 전 세계는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 와중에 있단다."

-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빈민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며 (125면)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152면)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153면)

"이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 저자는 이 ‘자유‘를 ‘자본을 위한 자유‘, ‘자유시장을 위한 자유‘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163면)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서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다.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기아 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방치할 수는 없다." (169면)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169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171면)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다." (176면)

"소리 없이 매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또한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180면)

오늘은 블루문 데이, 이 보름달을 보라!

 

《달빛 아래 과학 한 움큼》

장수길 지음 | [전파과학사]

오늘은 블루문 데이, 이 보름달을 보라!

- 그리고 보름달은 완전히 둥글지 않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양력으로 이번 달 1일이 우리의 큰 명절인 한가위였다. 이번 명절 때는 구름이 많이 낀 편이었고, 게으름을 피워 보름달을 보진 못했다. 기상센터에서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이번 한가위 보름달은 사실 명절 당일 다음 날인 10월 2일에 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의 모양은 태양, 지구, 달 사이의 운동에 따라 만들어내는 우주의 과학인데, 우리가 달을 보는 저녁 시간대에 이 세 천체가 정확히 직선 상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니까 보름달이 언제나 완벽한 원형일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었다. 대개 1-2%정도는 부족한 셈이다. 우리가 보는 보름달은 완전히 둥근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달의 모양에 따른 주기(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까지)는 30일(약 29.5일)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같은 달에 보름달을 두 번 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말해, 매달 초 1일 혹은 2일에 보름달이 뜬 경우, 같은 달 말에 두 번째 보름달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두 번 째 보름달을 블루문 blue moon이라고 한다. 이렇게 같은 달에 두 번의 보름달이 뜨는 경우는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매우 드물다. 영미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 중에 ‘once in a blue moon’이란 표현이 ‘매우 드문 빈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 인간이 발견한 사실이 인간의 문화와 언어 속에 스며들어 활용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보름달과 블루문에 관한 이야기는 달에 관한 과학책 《달빛 아래 과학 한 움큼》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30여년 간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쳐온 과학교사다. 저자는 오랜 시간동안 학교라는 현장에서, 그리고 교실 안에서 학생들과 만나며 과학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을 것이다. 때로는 건조해 보이는 과학지식,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학시간에 저자는 종종 이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지 않았을까 싶다. 문화 속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어온 ‘once in a blue moon’이란 표현이 과학적인 기준에서 실제로 어느 정도의 빈도를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면, 베테랑 교사가 이어가는 흥미로운 설명을 따라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한 권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 관한 과학과 문화에 관한 상식이 간결한 설명과 함께 곁들여 있다. 달이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는지 알게 되어 나에게는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 책을 읽고서 달의 탄생에 관한 여러 가지 가설이나, 지구와 달이 모두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소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블루문 blue moon이 있으니 곧바로 레드문 red moon은 없을까 상상해본다. 그런데 레드문이란 표현은 없어도 달이 붉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책에서 발견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개기월식 때 달이 붉게 보인다고 한다. 월식이라고 하면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의 직선 상에 위치하여 태양의 빛을 가리게 되고, 지구의 그림자 속에 달이 숨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개기 월식이라면 그림자에 달이 완전히 가리는데, 달이 붉게 보인다는 말은 또 무슨 까닭일까? 궁금증이 더 커졌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지구의 대기를 지나는 빛 중에서 파장이 긴 붉은 색 계열의 빛이 대기에서 일부만 굴절되어 달이 숨어버린 지구의 그림자 내부까지 상당 부분 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파장이 짧은 푸른 색 계열의 빛은 대기에서 붉은 색의 빛보다 산란이 심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면 산란된 푸른 빛은 지구의 그림자에 이르기 전에 사방으로 더 많이 흩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개기월식 때, 붉은 색 계열의 빛이 지구의 그림자가 생기는 달 표면에 더 많이 도달하기 때문에 달이 붉게 보이는 것이다. 다음 월식이 있을 때, 정말 달 표면이 붉게 보일지 확인해보고 싶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붉은 색을 띠는 달을 재미없게 레드문이라고 하지 않고 블러드문 blood moon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달과 관련한 신비로움, 달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 같아 달이 보다 감각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더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사적으로 혹은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긴 부분이었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달에 얽힌 전설이나 전래동화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시를 포함한 문학의 형식에서도 혹은 불교나 유교 등의 동양적인 종교와 문화에서도 달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대상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동서양의 문화 속에 남아 있는 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영화 <첨밀밀>에서 등려군이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연인에게 달을 보라고, 이렇게 소름 돋는(?) 대사가 나왔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언젠가 한번 더 영화를 보고 확인해보겠다. 저자가 알려주듯이 달은 이태백의 시나 윤선도의 시에서도 시인들의 벗이자 술친구이기도 했다. 인류문화사에서 달이 갖는 위상과 역할을 문학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쥘 베른의 과학소설 《달나라 탐험》과 《지구에서 달까지》에 담긴 과학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에 주목해본다. 이러한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현실로 이루어 졌는지 알게 되면, 과학소설이 단순히 허구가 아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류의 발전에 달에 관한 작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요인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달에 가고자 하는 꿈과 열망이 결국은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이 책은 어깨에 힘을 넣고 장황하고 어렵게 달의 과학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익숙했던 달에 관한 일상의 과학을 이야기한다. 때론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가지를 덤으로 더 얻을 수 있다. 학생들과 함께 오랫동안 소통해온 교사의 경험에서 그만큼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접근성이 좋은 것 같다. 다만 달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한 가지 제약일 수는 있겠다. 한편 이를 달리 보면, 달 하나의 대상에 대해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달이 이렇게 우리의 삶에 깊이 관련을 맺어 왔음을 새롭게 확인하고 배울 수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하다고 해서 우리가 대상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매우 드문’ 블루문 데이다. 한가위 보름달은 놓쳤지만, 오늘 밤에는 블루문을 보러 창밖을 봐야겠다. 오늘 놓치면 다음 블루문은 언제 볼 수 있을지는 책에서 확인해 보시길.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는 경험과 기억의 전염병 연대기’

페스트 La Pest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지음 |  변광배 옮김 | [미르북컴퍼니]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있다.(91면)

 

전염병의 정체가 확인된 후 도시가 봉쇄되면서 도시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가 된다. 막연한 공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거주자들의 삶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전염병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지난 9개월 넘게 구체적으로 목격한 바 있다.  70여년 전에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발표한 페스트를 우리가 겪은 상황, 그 구체성과 함께 비교하여 읽으니 우리의 경험과 깜짝 놀랄정도로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4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34세의 카뮈가 연대기적 방식으로 실감나게 써내려간 전염병에 관한 작품이다. 프랑스령 알제리 해변에 위치한 오랑이라는 중소도시를 9개월 남짓 휩쓸어버린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이다. 코로나19 감염병뿐만 아니라 페스트 역시 오랜 생명체의 역사를 거쳐 신중하게 진화해온 잘 작동하는 하나의 체계였다. 이 소설이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은 이유는 전염병이 군림하는 봉쇄된 지역의 공동체가 겪는 그 구체적인 양상이 아주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인간의 경험들이 모두의 기억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염병은 지구가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염병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단지 사람들만 사라져갈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설의 화자는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을 이야기하기 위해 연대기를 남기게 된 것이리라. 사람이 사라지면 이러한 기억 또한 단절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중심 화자는 30대 중반의 의사 베르나르 리외다. 아마도 소설을 쓸 당시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젋은 의사를 상상했을 법하다. 이 이야기 속에 묘사되는 의사와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정보는 아마 카뮈가 10대 후반부터 오랫동안 작가를 괴롭히던 폐결핵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병원이나 요양소, 병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소설에 상당히 반영되었을 것이다. 한편 2차 세계대전 당시 기자 활동과 레지스탕스 조직 신문 편집자를 지낸 경험은 소설 속에서 기자로 등장하는 레몽 랑베르에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은 느낌을 간결하게 표현해보면 ‘인간의 존엄에 대한 호소’가 아닐까. 다만 이와 관련한 정서가 오늘날 독자들의 정서에 거부반응이 없는지 확신하진 못하겠다. 카뮈의 시대와 비교해서 우리는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극도로 파편화된 현대인들에게 인간에 대한 카뮈의 관심과 애정이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다시 추적해보면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카뮈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1913년)에 출생했다. 그러니까 그는 20세기에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모두 겪은 셈이고, 특히 제2차 대전 당시에는 30세 전후의 청년으로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의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신문 편집자로서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이를 전달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숱하게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곧 인간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면 인류에게 무엇이 남을지 명명백백하게 자각한 사람이 바로 카뮈가 아닐까.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이 점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성으로 경험되는 페스트(우리 밖의 페스트)

 

     소설에서 전염병은 구체적으로 감지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시 전역에서 쥐들은 이미 죽어있거나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뒤이어 사람들은 하얗게 변해버린 눈, 거친 숨소리와 헛소리, 몸에 드러난 종기, 구토 등 병의 징후는 진화된 병원균의 치밀한 계획을 보여주었다. 번식하고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숙주인 인간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페스트가 경험되는 감각은 달라진 도시의 소음과도 관련이 있었다. 가게들은 문을 닫고, 차량은 제한되어 거리는 침묵 속에 놓여 있다. ‘침묵의 소리’ 역시 사람들이 경험하는 전염병의 구체적인 사회적 징후였다. 병을 막 진단받은 환자는 경적소리를 내는 앰뷰런스에 실려 격리되고, 페스트에 걸린 환자는 적막 속에 고통스런 신음을 내며 죽어간다. 거리는 다시 적막 속에 이따금씩의 차량 소음과 기계 소음이 간간이 들릴 뿐이다. 그나마 전염병이 나타나기 전에는 항상 들리던 소음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전염병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각되며 그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가 봉쇄되자 도시에 남은 시민들의 삶 또한 급변한다. 이 점은 이미 현재 진행중인 전염병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70여년 전에 작가가 묘사한 삶의 변화 또한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치료약이 부족해지고, 병실에는 환자가 넘쳐난다. 가게들이 문을 닫고 경제활동이 중단되어 실업자와 다름없는 휴직자들이 넘쳐나게 된다. 이들은 영화나 오페라를 보며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필름 유통이 중단되고, 레퍼토리에는 변화가 없다. 물자가 공급이 차단되니 차량 운행이 금지되고, 행정 당국에서 배급해주는 음식에 적응해야 했다. 우편물 반출이 안되니 통신수단마저 전보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물질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가차없고 기약없는 이별을 겪은 모든 이들에게 심리적 고통으로 다가온다. 감옥 밖의 수감자와 다름 없는 생활을 감내하며 고독과 회한, 체념의 정서를 경험한다. 코로나 전염병을 겪으며 몸과 마음에 가해진 구속을 통해 경험한 것을 통해 소설의 상황이 실감나게 이해되었다. 또 사람과의 거리두리를 통해 환자와 보호자와의 강제 격리와 극단적인 고립과정을 통해 동정심에 피곤을 느끼고, 윤리 의식마져 변화가 찾아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각자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돌보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전염병이 오래 정체되면 결국 사람들은 인간되기의 과정에 스스로 탈진해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봉쇄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제 단단한 지면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는 인간은 스스로를 방치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경험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화자인 의사 베르나르 리외 뿐만 아니라 조제프 그랑, 장 타루와 같은 인물들은 전염병이 한창 진행될 때에도 의료봉사대에 자원하여 활동했다. 뒤에서 타루에 대해 좀더 언급할 것이지만, 조제프 그랑 같은 인물은 작품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아보이지만 실은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랑은 50대의 시청서기로, 노란 콧수염의 키가 크고 구부정한, 다소 소심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출세를 하기 위한 커다란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전염병이 돌자 자신의 일 외에 의료보건대의 서기를 맡겠다고 한 인물이었다. 이런 그랑이 소설 속에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본 이유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작은 역할이나마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었다. 혈청을 개발하느라 온 힘을 쏟는 늙은 의사 카스텔처럼 그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조용히 일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다. 그랑(Grand)의 이름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한 사람의 작은 참여, 움직임을 통해 하나의 일상이 지닌 가치와 무게를 가만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달리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절망적이고 단조로워 보이는 이런 노력들이 우리의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기도하거나 살아 남아 여생을 살던가, 그렇지 않으면 병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가 있을까?  그랑이 자신의 역할을 흔들림없이 꾸준하게 완수해나가는 것처럼 주요 화자인 리외 역시 이런  행동에 대해 확고하고 구체적인 윤리 의식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리외는 무신론자로서 파늘루 신부와 달리 신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 대신 패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일 뿐이라고 믿는다. 도시가 봉쇄되기 직전 아픈 아내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로 보낸 리외는 의도치 않은 이별을 겪었다. 연락도 제대로 취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흔들림없이 해내고자 하는 인물이다. 물론 리외는 타루에게 자신이 가난한 노동자 가족 출신으로서 처음에 의사가 된 것은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직업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치명적인 전염병의 한 가운데에서 리외는 도의로 페스트와 싸우며 헌신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랑과 리외는 페스트의 도래 이후 구체적인 가치관 및 행동 기준에 따르는 인물이다.  

 

 

추상성으로 기억되는 페스트(우리 안의 페스트)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문자 그대로의 질병인 페스트가 가져온 삶의 변화와 국면들을 실감나게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페스트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의미가 확장되는 순간이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 다다온 인물이 바로 장 타루이다. 타루는 결론적으로 말해 10대 후반에 가출하여 오랑에 정착한 인물이다. 검사였던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타루는 어느 날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린 공판을 보기 까지는 부자간에 사이도 좋았을 것이다. 타루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려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타루는 자신의 개인사를 리외에게 들려주는데, 자신은 오랑에 와서 전염병을 만나기 전에 이미 ‘페스트’로 고통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곧바로 더 알듯말듯한 말을 리외에게 덧붙인다. “나는 그때 적어도  경우  세월 동안 끊임없이 페스트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333면) 실제로 페스트에 걸렸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타루는 한 가지 실마리를 더 전해준다. 타루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숙명적으로 이런 죽음을 유도한 행위나 원칙을 ()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다(333면). 그러니까 타루가 자신의 개인사를 꺼내며 언급한 ‘페스트’는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적으로 파악되는 의미는 사형제도 및 인권과 관련 있다는 단서였다. 타루는 사형선고를 ‘역겨운 도살 행위’라고까지 표현하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행위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타루가 ‘우리 모두는 페스트 속에 있다’,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각자가 그것을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 이라고 말했을 때(336면), 그가 사용한 ‘페스트’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 법복을 입은 그들’을 ‘최상급의 페스트 환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그 연관성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루가 언급한 ‘페스트’는 사형선고와 같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인간 사회와 문명의 야만, 제도의 폭력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인간이 저지르는 이런 잔악한 행위와 제도에 무감각한 것,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 말로 타루가 말한 ‘페스트’에 걸린 징후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는 실체적인 질병으로서의 페스트는 타루의 경험과 기억을 거쳐 추상적인 ‘페스트’로 거듭나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질병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타루가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이 부분이 특히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타루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억압의 폭력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함으로써 자신도 일종의 가해자임을 느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연대의식과 죄책감을 느끼는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지성인이기도 했다. 인간이 인간임을 주정하는 행위,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동과 관습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타루의 ‘페스트’는 비가시적인 대상으로 다가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잠식하는 야만의 상태로도, 혹은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를 지칭하는 추상적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읽다보면 이렇게 이질적인 개념의 ‘페스트’가 등장한다. 하나는 구체적인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라면,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페스트’다. 타루가 꺼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이 추상은 분명히 사형제도로 대변되는 인권문제와 우선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카뮈가 이 소설을 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과 겹친다. 전쟁터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제외하고도 나치 독일에 의해서만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독일인이 60만 명이 사망한 시기다. 전쟁의 본성 상 인권이 유린당하는 야만의 시기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좌절과 회의감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싸워야하는 대상은 병원균과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무엇보다 시대를 견디어온 당대 지식인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카뮈에게 ‘페스트’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지와 몽매를 상징하는 단어로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 같다. 그러므로  페스트에는 때로는 구체적이며 때로는 추상적인 층위를 갖는 ‘페스트’의 의미로 텍스트를 읽어나갈 수 있겠다.    

 

 

     그밖에 기자인 랑베르와 예수회 신부인 파늘루 신부도 흥미로운 인물인데, 이들은 소설 속의 사건들을 겪으며 성격에 변화를 가져오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각각 ‘사랑’과 ‘신앙’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강력하게 따르다가 보건위생대의 활동에 참여 하면서 페스트가 가져온 인간 조건의 구체성에 주목하게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파리에 두고 온 연인을 만나기 위해 도시 탈출 방도를 찾던 랑베르는 리외의 개인적인 상황을 알게되면서 탈출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다음날 새벽에 리외에게 전화를 걸어 자원봉사단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전한다. 리외 역시 부인을 멀리 떨어진 요양소에 지내며 가차없는 이별을 겪는 가운데,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랑베르는 리외의 사정을 듣는 순간 비로소 이 문제(페스트)가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자신을 이방인으로 여기며 이곳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의식은 이제 자신이 ‘이곳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랑베르가 페스트를 우리 모두와 관계된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이다. 파늘루 신부 역시 예심 판사 오통의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는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보는 경험을 통해 신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질병의 견해에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서 랑베르와 파늘루 신부는 그랑이나 리외처럼 꾸준한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대신 어느 사건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고 질병에 대한 추상적 견해에서 구체적인 견해를 지니도록 변화를 겪는 인물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질병 및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묘사한 대목에 특히 주목했다. 무엇보다 올해 코로나19를 겪으며 작가가 기술해 놓은 전염병에 대한 통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질병에 대응하는 여러 인간들의 모습이나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악덕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카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리외의 입으로 작품 속에 마련해둔 듯하다.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연대감을 느껴요. (…)  관심사는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339면) 그러므로 ‘페스트’에 걸리지 않으려고 깨어있는 것 말고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 한 사람의 몫을 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 나는 이 글의 처음에 인용한 문장에 그 실마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페스트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것말이다. 질병이든 무지에 의한 악이든 모두 인간이 쉽게 고립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조건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말이다. 이에 저항하는 길은 상대방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임을 깨달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인 것이다. 타인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동조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무관심에 저항하는 일이 아닐까. 추상과 구상의 ‘페스트’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손을 타인에게 내미는 일은 곧 인간이란 종의 존엄을 담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페스트가 리외에게는 ‘끝없는 패배’를 의미하더라도 이에 대항하여 투쟁을 중단하지 말아야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작가는 나에게 이것이 필연임을 호소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란 사람들이 그가 죽는 것을 목격하는 경우에만 무게를 갖는 법이다."- P10

"그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P91


"페스트는 마치 추상처럼 단조로웠다."- P122

당신에게 이 페스트가 어떤 존재인가?
그건 끝없는 패배예요.
: 타루가 리외에게 묻는 말에 리외가 한 대답- P172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P177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도의뿐입니다."
"전체적으로 그게 뭔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내 경우, 그것은 내 본분을 다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 리외의 말- P219


"간단히 말하자면, 리외,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에 이미 페스트로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타루의 말- P325


"나는 그때 적어도 내 경우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페스트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숙명적으로 이런 죽음을 유도한 행위나 원칙을 선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타루의 말- P333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 각자가 그것을, 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래요, 세상에 그 누구도 그 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 타루의 말- P336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 리외의 말- P339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 마지막 문장-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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