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 처음 만난 오라시오 키로가 읽기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Horacio Quiroga) 지음 |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사랑은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랑과 죽음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이면이다. 이 둘을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광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루과이의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사랑과 죽음을 이어주는 광기가 여러 무늬의 형태로 등장한다. 인간사회의 부조리나 야생의 모습으로 또는 자연의 법칙과 지배를 받지만 불가해한 모습을 띠고서 말이다. 처음 접해보는 키로가의 작품은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매력적이었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삶의 순간들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하고 여기에 기발한 상상력을 더하는 작가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줄에 삶의 강렬한 인상을 담는 것 자신의 모토로 여겼던, 간결하지만 강렬한 작품들을 내놓은 키로가라는 인물이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키로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사랑과 실패의 고통이 담긴 「사랑의 계절」 같은 작품도 있지만, 이 책의 무게는 ‘죽음’에 좀더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다양한 작품 속에서 ‘죽음’에 대한 저자의 강박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저자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의 체험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키로가는 우루과이의 유복한 상류계급 출신에, 그 자신이 우루과이 영사를 지내기도 했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한 살 때 총기사고로 사망한 아버지를 시작으로, 형과 누나는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첫번 째 아내는 음독자살했으며, 대통령이었던 지인의 자살을 지켜보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결투의 증인으로 총을 검사하다 총이 격발되어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사람에게 죽음의 저주라는 것이 정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키로가의 삶에는 죽음이 언제나 그의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이런 비극적인 원체험에서 키로가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죽음 뿐이라고 확신했던 것일까. 그는 위암으로 진단받고 음독자살한 이후에야 비로소 죽음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키로가의 삶이 오롯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바로 오라시오 키로가였다.

여러 작품에서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죽음은 삶의 우연성 속에서 다가오는 ‘불-시’의 죽음이다. 여기에 다양한 ‘광기’가 개입한다. 「목 잘린 닭」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인간 존재의 부조리라는 이해불가능함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강렬한 잔상효과로 다가온다. 반면 「표류」「일사병」「천연꿀」과 같은 작품은 인간 사회와 다른, ‘야생’이라는 광기앞에 무기력한 존재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 죽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밖의 작품으로부터 작가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키로가는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관찰자인 듯하다. 하지만 여러 작품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작가의 내면 어딘가에는 언제나 ‘호기심’과 ‘공포’가 함께 자리하는 듯하다. 바로 죽음을 바라보는 키로가의 내면에서 ‘벽돌담’이라는 인식의 경계를 바라보는 백치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 너머의 세계는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무지의 세계다. 무지가 주는 공포는 언제나 호기심과 한 쌍을 이룬다.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밀림의 세계에도 작가의 호기심과 공포가 함께 교차하고 있었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다양한 죽음과 광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드는 작품을 고른다면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선택하겠다. 이 작품이 항상 어긋나고 실패하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유일하게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기묘한 사랑이야기가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뿐만 아니라 ‘관계’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이 사랑’ 역시 일종의 꿈 도는 착란은 아닌가. 나는 사랑이라는 그림자를 쫒도록 유전자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사이보그 내지는 이동기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혹은 내가 이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 뇌막염 증세로 착란증세를 겪는 마리아와 이를 매개로 소심한 엔지니어 두란이 관계를 맺는 기발한 사랑이야기는 소크라테스의 한 마디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더욱 신에 가깝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 속에 신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쩌면 ‘착란증세로 가장한 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이유다.

자신들의 기묘한 만남을 회상하는 한 부부의 이야기에는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과 다른 점이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은 「사랑의 계절」의 ‘여름’ 편에 나오듯 젊은이들의 자존심과 허영심이 벌이는 게임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관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대립하며, 고민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철없는 시절의 사랑이 더이상 아닌 것이다. 오히려 ‘행위와 실천’이 선행하여 사랑에 이르는 ‘아나키즘적’인 사랑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관계의 문제’를 내게 던져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람과 사물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의 본질을 생각해보게 한다. 인형과 결혼식을 올린 어느 청년의 실화를 떠올려본다. 혹은 고장난 돌봄 로봇을 애도하던 어느 노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대상과 맺게되는 색다른 관계 혹은 사랑의 모습을 이 소설로부터도 상상해볼 수 있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사랑과 죽음을 마주하는 여러 인물과 동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웅들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과 마주하지만, 각자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도 하는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키로가의 인물들은 운명에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죽음에 격렬히 저항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이미 삶의 경계 밖에 있는 죽음이란 현상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체념하는 존재에 더 가까운 듯하다. 작가는 이 존재들을 혹은 이들의 시선에서 운명을 무감하게 바라보는 방관자이다. 하지만 키로가의 작품에서 희망적인 단서를 하나 찾을 수 있다면, 담담하게 사랑을 바라보게 된 그의 시선을 통해서 일 것이다. 나는 인간들의 숱한 오해와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가는 행위라는 점을 키로가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삶에서 순수한 추억보다 아름답고, 우리를 단단하게 단련시켜주는 것은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말 인용- P39

"서서히 남자의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목요일이던가....

그리고 남자의 숨이 멎었다."

- <표류> P112

"단 한 줄에 삶의 강렬한 인상을 담아야 한다."

- 오라시오 키로가의 말 (번역자의 해설에서 재인용) P333

 

‘우리가 되돌아갈 길은 없다’ - 영화 <알바트로스>를 보고

 

 

‘우리가 되돌아갈 길은 없다

: 크리스 조던(Chris Jordan) 감독의 영화 《알바트로스 Albatross 보고

 

영화는 영국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의 시

 ‘늙은 수부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한 구절로 시작한다.

 

The spirit who bideth by himself

In the land of mist and snow,

He loved the bird that loved the man

Who shot him with his bow.

 

연무와 눈의 나라에서

혼자 사는 정령,

그는 사랑했소

활로 자신을 사람을 사랑했던 새를.

 

[번역 출처: 윤준 지음, 《코울리지의 시연구》, 도서출판 동인, 144p]

 

이 시에서 ‘’는 물안개와 눈의 나라에 사는 정령을 가리키며, 이 시에서 가리키는 ‘그 새’가 바로 알바트로스이다. 알바트로스는 자신을 쏘아죽인 인간을 사랑했다. 정령은 인간에 의해 죽어간 무고한 이 새를 사랑했다. 이 구절에서 무엇보다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새를 사랑함’이다. 새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영화감독 크리스 조던은 처음에 북태평양 한 가운데에 버려진 미드웨이 섬에 와서 이 새를 카메라에 담는 작업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이 버린 온갖 종류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된 알바트로스 사체를 촬영하는 작업으로 시작했지만, 감독의 시선은 점차 알바트로스라는 새 자체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감독은 인간의 영향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알바트로스에 대한 연민을 넘어 이 존재에 대해 진정한 ‘애도’를 보내게 된 것이다. 감독은 이를 ‘사랑’이라고 표현했는데, 영화의 부제를 ‘우리 시대를 위한 사랑이야기’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알바트로스가 겪는 재앙의 한 단면을 마치 다른 알바트로스가 옆에서 지켜보듯이, 새의 눈높이에서 가까이 다가간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독특한 시점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바트로스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미드웨이섬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 위치해있는 섬으로, 2차대전 당시 미해군의 태평양 기지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병력이 모두 철수하고, 최소한의 인력이 관리하는 정도로 버려진 섬이 되어버렸다. 영상 중간중간에는 인간이 떠나간 적막한 군사시설물을 볼 수 있다. 이런 미드웨이섬은 가까운 육지가 최소한 3,000 km 이상 떨어져 있는 고립된 섬이다. 알바트로스는 이 섬에서 처음부터 천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새들은 낯선 존재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 의해 멸종한 새로 잘 알려진 인도양 모리셔스 섬의 도도새처럼 이 새도 역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모리셔스섬의 도도새 역시 천적이 없었기 때문에, 심지어 날개도 퇴화되어 날지 않게 되었다. 다만 도도새는 이 섬에 처음 상륙한 유럽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식용을 위해서든 단순한 오락거리를 위해서든 총과 칼을 들고 다가간 사람 앞에서 날지 못했고, 심지어 빠르게 도망가지도 못했던 도도새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유럽인들을 바라보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알바트로스는 날 수 있지만 카메라를 들고 이들 무리 속에서 가만히 자신들을 지켜보는 감독에 적응하게 되었을 것이다.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새의 얼굴에 가까이 내밀어도 이들은 신경을 쓰지 않은 듯 보였다.

 

알바트로스는 현존하는 가장 큰 새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에 폭넓게 서식하며, 펼친 날개의 길이가 2 미터에서 최대 3.7 미터까지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양쪽 팔을 짝 펼쳤을 때 길이보다 길고, 심지어는 그 두 배 길이 가까이 되는 셈이다. ‘신천옹’이라고도 불리는 이 새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도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만난 신천옹이 뱃전에 내려 앉아 쉬는 동안 선원들이 손으로 잡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나아가 ‘모비 딕’의 흰 색과 더불어 새의 흰 색은 ‘불길함’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크리스 조던의 《알바트로스》에서는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불길함’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알바트로스가 환경운동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영화에서도 분명히 보여주듯, 알바트로스 사체에서 발견된 수많은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바트로스는 대개 한 개의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데, 점점 원기 왕성해지는 새끼에게 먹일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한다. 연구자들이 보고한 추적조사에 의하면, 알바트로스는 일단 새끼에게 먹일 먹이를 구하러 바다로 나가면, 일주일 이상 바다 위에서, 통상 16,000 km를 비행한다고 한다. 결코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말이다. 알바트로스는 이 과정에서 바다에 떠있는 각종 쓰레기들을 먹이로 오인하고 삼켜버린다. 인간이 버린 각종 쓰레기를 뱃속에 가득 채운 어미 알바트로스는 둥지로 돌아와 자신이 먹은 것들을 다시 게워내어 새끼에게 먹인다. 바로 여기에 ‘지속되는 재앙’이 있었다. 문제는 미드웨이섬이 오염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인간이 무심코 버린 각종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들었고, 알바트로스는 이 쓰레기조각들을 수집하여 배에 채우고 돌아오게 된 것이 문제였다. 반면, 같은 섬에 사는 ‘흰제비갈매기’는 알바트로스처럼 새끼에게 줄 먹이를 먼 바다에서 구해오지 않기 때문에 플라스틱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다. 알바트로스에게 닥친 재앙은 1차적으로 이러한 정황에서 비롯되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죽은 알바트로스의 배를 갈라 새의 뱃속에 있는 소화되지 않은 잔존물을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었다. 새의 사체에서 나온 물건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영상에서만 알아본 물건들은 주로 물에 뜨는 플라스틱 조각 및 병뚜껑, 칫솔, 그물, 낚시줄 등으로 보였다. 영화에서 감독은 자신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간인 자신이 ‘알바트로스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반면, 이 새들은 자신이 이유도 모른 체 죽어가야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감독은 직접 죽은 새의 몸에 손을 얹고, 죽은 새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 새들에게 닥친 ‘-’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화자인 감독은 이러한 자신이 경험을 두고, ‘애도의 진정한 본질은 사랑과도 같다. 바로 상실에 대한 사랑의 경험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젠가 코끼리에 관한 어느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한 코끼리는 뼈만 남게 된 어미 코끼리의 잔해에 매년 찾아와 끌어 앉고 마치 울부짓듯 소리를 내었더랬다. 코끼리 역시 일종의 ‘애도’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코끼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감독이 담담하게 꺼냈던 이 말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크리스 조던 감독에게도 마찬가지로, 그가 해변에서 발견하여 뱃속의 잔존물을 꺼낸 대상은 ‘알바트로스라고 불리는’ 새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한때 현존했던 바로 그 새’였던 것이다. 이제 살아남아 비행에 성공한 알바트로스들은 일단 섬을 떠나면 3년에서 5년간 한 번도 땅을 밟지 않고, 바다 위에 혹은 몇 주 씩이나 하늘에 떠있게 될 것이었다. 알바트로스들이 떠난 미드웨이섬은 고요했다. 다만 섬의 해안가에는 뱃속의 이물질들로 인해 죽은 알바트로스의 사체들만이 말없이 남아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느꼈던 점은 단순히 이 새가 마주해야 했던 재앙에 대한 연민을 넘어선 감정이었다. 만약 어떤 이유로 알바트로스 대신 인간이 이러한 운명을 맞았다면, 알바트로스 혹은 다른 존재가 인간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이처럼 인간이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과연 죽은 알바트로스의 운명 대신 인간의 운명이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을까? 과거의 역사가 준 교훈은 지구상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무차별적이다. 인간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영화 《알바트로스》가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보다 알바트로스의 재앙을 통해 여기에 투영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은 알바트로스를 쓰다듬으며 흐느끼던 감독은 인간의 운명 또한 예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누리는 문명으로 인하여 강제로, 공동운명체가 되어버린 이 알바트로스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알바트로스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나아가 인간의 운명은 알바트로스가 겪고 있는 삶과 운명의 연장선에 있음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영화에서 감독이 남긴 한 마디가, 영화가 끝나고서도 특히 기억에 남았다. 바로 “There is no going back.”이라는 말이었다. ‘되돌아갈 길은 없다후퇴는 없다’ 정도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이 표현은 영화에서 새끼 알바트로스들이 처음 비행을 시도하기 위해 해변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이 알바트로스와 인간의 운명이 오버랩되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직간접적으로 인간이 유발한 모든 원인으로 인해 현재의 알바트로스와 미래의 인간이 겪게 될 운명을 경고한 메시지로 읽힌다. 이미 우리 인간에겐 ‘순수의 상태’로 되돌아갈 방도는 없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래 인간의 운명에 보내는 과거 인간의 애도와 사랑의 노래다.

 

Farewell, farewell! But this I tell

To thee, thou Wedding-Guest!

He prayeth well, who loveth well

Both man and bird and beast.

 

가시오, 가시오! 하지만 한마디는

당신에게 해야겠소, 결혼식 하객이여!

사람뿐만 아니라 새와 짐승을

사랑하는 이가 기도를 하는 이라고.

 

[번역 출처: 윤준 지음, 《코울리지의 시연구》, 도서출판 동인, 154p, Part VII ]

이반 일리치의 신간 《H2O와 망각의 강》,《젠더》

 

 

《H2O와 망각의 강》

이반 일리치 지음 | 안희곤 옮김 | 사월의책

《젠더》

허택 옮김 | 사월의책

이제는 나오지 않을 줄만 알았던 이반 일리치의 책을 몇 년간의 공백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이반 일리치를 검색하면 대부분의 결과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검색되곤 하여 다소 번거롭긴 하지만, 내가 이야기 하는 이반 일리치는 물론 다른 사람이다.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일리치는 뭐랄까 상당히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타이틀을 뭐라고 딱히 정하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상가의 면모와 역사가의 면모에 ‘한 때’ 카톨릭 사제이기도 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일리치의 저작을 단지 몇 권만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나는 일리치를 우리에게 ‘문제를 던지는 문제아’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일리치의 글쓰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를 극대화한다. 그리고 해결책 혹은 답을 독자에게 주지는 않는다. 악동처럼 독자에서 질문을 던지고 독자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근에 미셸 푸코를 알고 싶어서 그의 책을 두어 권 읽어보았는데, 일리치와 푸코는 물론 많은 점에서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몇 가지 유사한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현대의 어떤 문제점을 분석할 때, 역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계보학적 관점에서 과거의 언어나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는 작업을 한다.두 사람 모두 1926년 생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 두 사람이 관심을 가졌던 대상에는 ‘전문가의 문제’도 있다. 다만 푸코는 현대사회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의 전략적 위치에 주목하고 눈여겨본 바가 있다. 반면 일리치는 전문가가 지녀온 권력, 우리가 전문가라는 집단에 권위를 맡겨버린 현상에 대해 비판한 바가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전문가’라는 집단에 대해 반대 입장에 서서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물론 나는 아직 이 두 사람을 어설프게만 알고 있다고 미리 자백하겠다. 그러니 두 사람의 철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는 척을 하지는 않겠다.

이반 일리치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생각거리, 질문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한 때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의 옆집에 살면서 절친으로 지내기도 했던 일리치는 주장의 독특함으로 인하여 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우파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하고, 천주교 사제이면서도 교황청을 비판하여 마찰을 빚다가 사제직을 관두기도 했다. 또 좌파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많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이 이 정도라면 그는 인성이 이상한 사람이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질만도 하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일리치에게는 현대 사회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다시보기’와 ‘다르게 보기’의 대상이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심해보고 따져보고 질문을 던져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리치의 여러 저작을 떠올려보면, 그는 대체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푸코가 권력 개념에 기반하여 병원, 정신병원, 감시 시설, 통제,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과 배제 등의 주제에 대해 문제제기와 분석을 했다면, 일리치 역시 병원, 학교의 문제, 남녀문제 등을 현대 문명과의 관련성 속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관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푸코의 철학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 자본주의, 현대 문명에 대해 다시 보고, 다르게 바라볼 것을 요청하는 일리치의 사상 역시 진지한 독자들에게 ‘유의미한’ 생각 거리를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가 물의 화학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H2O가 ‘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몇 년 전에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지음, 권루시안 옮김, 물레2010)를 읽다가 《H2O와 망각의 강》이라는 텍스트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궁금했더랬다. 아마도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중에서 9장 ‘질료가 제거된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물’의 의미를 따지며, 그 의미의 변천을 따라가는 내용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인간이 인식하는 이 ‘물’이라는 대상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분석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거에 영감을 주는 신화적 상상력의 ‘물’이 있었다면, 과학혁명을 지나 물이 H2O라고 ‘인식’된 이후의, 혹은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서 ‘물’이 갖는 위상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내 짐작이 맞는지를 알아보려면 읽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텍스트가 과연 번역되어 나올까 하는 아쉬움과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결국 《H2O와 망각의 강》을 통해 그동안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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