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정복, 이제야 출발선에 서다」 - 촌평을 읽고

 

정복, 이제야 출발선에 서다

 

창작과비평 187(봄호) ‘촌평

최형섭 지음 | [창비]

 

 

 

 

계간지 《창작과비평》에는 각호마다 새로 발간되는 도서들에 대해 각 분야의 전문가가 짧게 쓴 서평이 실린다. 지난 호부터 여러 주제에 걸친 서적들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있는데, 나름 읽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과학 분야 서적에 대한 서평이 궁금해서 주로 과학 도서에 대한 글을 먼저 읽는다. 이번 호(187호)에서는 암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국내 과학자가 직접 쓴 책에 주목했다.

 

 

암이라는 질병은 이제 우리 생활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가까운 지인, 친척 들만 해도 암을 진단받은 분들이 상당 수 있어서, 이제 암은 마치 성인병의 하나로 여겨질 정도다. 일본의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자신의 방광암 수술을 계기로 암 연구를 취재하여 2007년에 펴낸 《암, 생과 사의 수수께기에 도전하다》만 하더라도 당시 암연구의 최전선을 소개해주었다. 이번 호에서는 생화학을 전공한 과학자 남궁석씨가 쓴 《암 정복 연대기》를 소개 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취재 이후 그 동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을지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서평을 쓴 저자는 수전 손택이 쓴 《은유로서의 질병》을 언급한다. 암과 같은 질병에 대해 대중이 갖는 위상의 역사성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 부분을 소개하는데, 손택은 책에서 ‘과거에는 암이 인과응보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만 서평의 저자가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희생자가 자신의 세계와 자신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의 결과”라는 표현이 마치 손택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보이도록 해 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표현은 칼 메닝거라는 사림이 주장한 내용을 손택이 자신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었다. 과거에 암을 비롯한 질병은 개개인들의 도덕적 품성의 결과이자 심판이었다는 생각이 퍼져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카시의 책 《암, 생과 사의 수수께기에 도전하다》에서는 세계 최초로 암유전자 RAS를 발견한 로버트 와인버거 교수의 말을 소개한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암을 낳는다. 암은 다세포 생물의 숙명’이라고 말이다. 이처럼 과학의 발달로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세월이 흘러 많이 바뀐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암을 바라본다. “암은 나의 내부에 있는 적이다. 당신의 암은 당신 자체다” 라고 말이다.

 

 

다치바다 다카시처럼, 서평의 저자 역시 암 연구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암 정복 연대기》에서는 ‘암 연구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말한다. 치료도 그렇지만 암이라는 대상 자체에 대한 이해가 최근에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평의 저자는 《암 정복 연대기의 예비 독자들이 눈여겨볼 사안 두 가지를 간결하게 조망한다. 하나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여러 암 치료제들이 아주 최근에 개발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의 연구와 발전이 이전에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기초 연구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주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안들, 물음들을 던져주는 셈이다.

 

 

여기에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책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며 다른 과학서들과의 맥락을 덧붙인다. 이를테면 《암 정복 연대기는 한국의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분야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 했다는 의미’라고 평가한다. 이 말은 연구에 전념해온 국내 학계가 이들이 축적한 지식과 정보를 나머지 비전문가, 일반인들과의 소통에 다소 소홀했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요즈음에는 해외의 좋은 도서들도 많이 번역이 되고 있고, 국내 전문가 필진들도 조금씩 들어나고 있지만, 우리의 말로 다시 쓰는 분위기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가 더 확대되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초파리 과학자 김우재의 저서도 함께 소개하며 연결짓는 독서를 권하고 있다. 이런 언급은 국내 필자가 문제 의식을 갖고 쓴 글들에 주목하고 맥락화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요한 일이다.

 

 

학창시절 생물학 개론을 들은 적이 있는데, 유전학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유전자는 일종의 스위치’라는 개념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에는 유전자가 정보로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발현’되지 않는 무용해보이는 유전자라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특정한 환경적 요인이나 내부적인 조건의 변화로 이렇게 잠을 자던 유전자들이 스위치처럼 켜져 새로운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전자가 방사능이나 발암 물질에 노출되는 등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 아니면 노화로 인해 돌연변이가 발생하기도 하며, 이로 인한 세포 분열 기능과 세포 파괴 기능의 변형 등이 얽혀 암을 만드는 조건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암 정복 연대기는 암이란 대상 자체에 대한 물음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왔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학창시절 배운 지식과 많은 지인들이 경험하는 이 질병에 대한 실질적인 위험성, 그리고 암 발병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과 환경에 관한 물음들을 지니고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암이란 개개인의 신체 내부에서 드러나지만, 그 그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속한 환경 및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로운 지성인의 모습을 읽다 - 조지 오웰의 《책 대 담배》

 

담배 (Books v. Cigarettes)

조지 오웰(George Owell) 지음 | 강문순 옮김 | [민음사]

 

 

 

자유로운 지성인의 모습을 읽다

 

 

담배는 조지 오웰의 글 몇 편을 모은 얇은 산문집이다. 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으로 미국의 비평가이자 논쟁가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로부터 비롯되었다. 히친스는 자신의 책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도 신랄하게 ‘까면서도’, 조지 오웰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동물농장을 통해서 스탈린 독재를 비판한 사람이란 인상만 갖고 있던 조지 오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계기였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담배는 소설에서 상상했던 오웰의 면모를 좀 더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특히 짧은 산문임에도 오웰의 신랄한 비판의식과 글쓰기에 대한 고민, 그리고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견해 등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38면)라고 말할 정도로 오웰에게는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던 것 같다. 감히 톨스토이라니! 톨스토이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 특히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를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톨스토이의 면모를, 그래서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문제로 부인과 심각한 불화를 겪었던 톨스토이를 고려하면 오웰의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는 한 쪽을 다소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여간 오웰이 비판하는 방식은 이처럼 비판의 대상에는 성역이 없었다고 보아야할 사례였다. 오웰이 더 중요시했던 것은 ‘독립적인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표현의 자유’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산문집에서는 글쓰는 사람, 특히 책을 읽고 쓰는 서평가로서의 면모가 여러 편의 글에 묻어난다. 책이 비싸서 안산다고 하는 이들의 말에 1년 간 이 불평분자들이 펴대고 마셔대는 담배와 술값을 계산해서 자신이 구입한 도서들의 가격과 비교하며, 책을 사서 보는 일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일임을, 말하자면 ‘구라치지 말라’고 전하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책읽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될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솔직한 것이 대체로 더 낫다.

 

 

한편 오웰은 이 책에 소개된 여러 편의 산문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책들에 대해 주관적이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견해를 표명한다. 토마스 칼라일이 ‘똑똑하긴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영어 문장을 쓸 재능은 없었다’라고 돌직구를 날리거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앞부분은 인간 사회를 가장 통렬하게 공격한다’라고 말하면서도 후반에서 ‘스위프트는 자신이 흠모하던 종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실패한다’라고 주저함 없이 언급하고 있다. 아직 내가 읽은 오웰의 작품이 별로 없긴 하지만, 오웰의 신랄한 비판을 따라가다보면 통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문학 혹은 보다 폭넓게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를 언급하는 부분 역시 이 책에서 주목해볼 만한 부분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뿐만 아니라 르포르타주를 살펴보면 오웰의 삶은 자신의 글과 정말로 일치했던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점은 작가로서 오웰이 정치의 참여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다.”(60면)

 

지난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63면)

 

 

특히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와 같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고 쓴 이 책이 ‘노골적인 정치 저작’임을 인정하면서, ‘내 문학적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진실을 말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견해를 드러낸다.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의 표현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면 ‘애초에 유대인 학살은 없었다’라거나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라는 지적 태만과 허무주의로 빠져버리기 쉬울 것이다. 특히 거짓 권위를 갖는 이들에 의해 유포되는 거짓 사실이 그러하고,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는 한 말이다. 오웰의 삶은 이처럼 인간의 특정 집단들이 만들어내고 강요하는 ‘거짓’을 고발하고 이를 비판하는 삶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지 오웰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 게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백미는 오웰이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걸리버 여행기를 언급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유토피아로서의 ‘천국’을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단테의 신곡을 일부 읽으면서 느꼇던 것이지만, 천국에 올라간 ‘유일한 사람’으로서 단테가 유령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부터 여행하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른다.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은 너무나 디테일하고 끔찍한 반면, 이들 일행이 천국에 이르면 천사가 노래를 부르고,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묘사하는 정도다. 한 마디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싱겁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느 쪽이든 서양인들이 상상한 세계이긴 하지만, 천국에는 유독,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상상력이 잘 발휘되지 못한 영역이었다. 조지 오웰 역시 이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오웰이 표출하는 신랄함의 백미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천국은 대개 어느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곳으로 그려진다. (…) 하지만 천국을 묘사할 때면 곧바로 황홀과 더없는 기쁨과 같은 단어에만 의존할 , 단어가 어떤 내용을 담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제로 가장 중요한 글이 테르툴리아누스가 유명한 글일 텐데, 글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천국에서 누릴 있는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70-71면)

 

 

이렇게 짧은 몇 편의 산문에서 작가의 캐릭터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 떠올려보니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줄곧 보여주는 신랄함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히친스에게 영감을 주었던 지점은 바로 오웰이 외부의 모든 대상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력으로 평가하고 바라보는 ‘자유인’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로 ‘노예와 자유인’에 대해 고민하고 언급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를 히친스가 역시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대상의 권위나 사회의 규범이 제한하는 범주를 벗어나 스스로 따져보고 판단하겠다는 ‘자유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히친스라는 걸출한 비평가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오웰의 면모를 이 얇은 산문집에서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글쓰기의 비밀은 우리 안에 있다! 《네 번째 원고》 를 읽고

번째 원고

존 맥피(John McPhee) 지음 |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같고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글이 실패작이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257면)

 

 

글쓰기로 몸부림을 치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증상을 열거하고나서, 그러니까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라고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린 이 사람은 존 맥피라는 논픽션 작가다. 그가 왜 이렇게 언급했던 것인지 궁금하다면 논픽션 쓰기를 따라 읽어가다보면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 나올 것 같다. 이 책은 글쓰기의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픽션 글쓰기의 대가 존 맥피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또 다른 논픽션의 대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 잭 하트가 쓴 논픽션 쓰기라는 책에서 였다.

 

 

해설 내러티브 논픽션의 대가

 

맥피는 정확하고 신중한 스코틀랜드 남자다. 옷차림새도, 행동거지도 쓰는 스타일을 닮아 단정하다.

 

 

잭 하트가 쓴 논픽션 쓰기에는 존 맥피에 대한 언급이 책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 나온다. 심지어 한 페이지 이상을 위에 인용한 것처럼 존 맥피라는 인물에 대해 묘사하고, 그의 글을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다. 도대체 존 맥피라는 인물이 누구이길래, 이처럼 잭 하트 자신이 저술하는 책에서 이렇게 칭송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눈여겨보았던 부분은 존 맥피가 글의 구조를 설계할 때 사용했던 다양한 도표들을 가져와 자신의 책에서도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만나게 된 번째 원고는 저자의 면모에도 관심이 갔고, 이와 더불어 저자가 활용하던 글의 구조 설계 과정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책이 끝나는 부분에서 저자가 언급하듯이 논픽션,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창의적 논픽션은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글쓰기’다. 이 책의 앞부분에 샘 앤더슨이란 사람이 맥피의 정신에서 언급하듯이 맥피에게 글쓰기의 고충은 상당부분 글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에 있다. 이번 독서는 무엇보다 저자가 논픽션 글쓰기를 할 때, ‘구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왜 그렇게 ‘구조’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

 

 

다른 논픽션 작가들이 존 맥피를 많이 언급하고, 참고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구조에 대한 고민, 연구’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우선 독자들이 저자가 설계한 구조를 눈치채지는 못하게 하라고 주문한다. 이 정도의 선에서 구조를 세운 다음 키워드를 뽑아 기록하고, 분류된 자료를 가지고 견실한 도입부를 쓰라는 것이 주요한 골격이다. 논픽션인 만큼 글에 등장할 인물과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 대개 논픽션의 경우 연대기적으로 사건을 기술할 것 같지만, 존 맥피가 제시하는 구조의 설계도 그림은 마치 소설의 플롯 구성처럼 ‘플래시 백’과 ‘플래시 포워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단순한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하고 있다. 따라서 글의 시작 역시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배치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 직전에서 마치 영화를 보듯이 바로 독자들의 눈길을 붙들고 나아갔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플래시 백’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주로 사용하던 사건 보도 형태의 기사 작성 형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존 맥피가 톰 울프와 함께 논픽션 글쓰기의 파격을 도입했던 ‘뉴 저널리즘’의 시대 배경 속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은 전통적으로 소설에 집중했던 잡지 <뉴요커> 역시 60-70년대를 거치며 논픽션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속 필자를 많이 발굴했던 분위기와 겹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처음부터 논픽션 작가가 된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시나 소설 등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본 뒤에야 자신이 논픽션에 보다 흥미를 지니고 스스로에게 적합한 장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사람인 까닭에 한 단어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마비상태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경험도 들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서 연필과 종이를 들고 아무 데나 누워서 뭔가가 떠오르면 휘갈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더 진행이 안될 때까지 ‘계속 써내려 가라’는 것. 그런 다음 다시 컴퓨터에 앉아서 종이에 적은 내용을 파일로 옮기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는 대목보다,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곁들이는 대목에서 저자 자신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논픽션 작가인 만큼 자신이 써 놓았던 사항들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 들이나, 편집자들과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긴장을 유지하며 옥신각신 하는 이야기, 혹은 은근한 유머들을 웃으면서 따라가다 보니 어느 새 존 맥피라는 인물이 눈 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반 세기 넘게 글을 써오면서도 여전히 ‘글쓰기 마비 상태’를 겪기도 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글쓰기의 본질과 고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글쓰기 비법이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년도 전에 시학에서 제시해 놓은 것들의 다양한 변주들에 불과하다는 점과, 여기에 이르는 길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이 책에서 아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저자의 당부는 ‘글쓰기는 선별이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의 문제다. 이 선별과정은 글쓰기 소재를 취재하는 현장에서 노트에 낙서를 하는 동안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취재 대상을 인터뷰할 때도 받아 적은 말의 대부분은 생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도입부를 쓰거나 초벌 원고를 쓰기만 한다면, 그 때부터 집필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저자는 알려준다. “수정이야말로 집필 과정의 본질이다(260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네 번째 원고’인데,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애착이 담겨있다. 저자는 세 번의 퇴고를 거쳐 손에 주어진 이 ‘네 번째 원고’에서 보다 나은 단어나 어구를 대체할 표현을 찾는다고 한다. 저자는 이 과정을 가장 즐겨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단어는 이미 알고 있지만, 보다 적확한 단어 혹은 어구를 찾아내어 수정하기 위해 이 단어들을 사전에서 또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 바로 저자가 ‘네 번째 원고’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자신의 삶 속에서 찾아낸 요소들로 마치 두서 없이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프린스턴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이야기나, 이제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텍스트 에디터 프로그램 사용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을 닮아 딸들이 모두 글쓰기와 관련된 삶을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이들의 관계 역시 전체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글쓰기의 비법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다른 글쓰기 책에서 언급하는 요령들 몇 개를 이 책에서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글쓰기, 특히 논픽션 분야의 글쓰기 대가가 자신의 글쓰기 인생에서 건져 올린 글쓰기의 면면을 솔직하고 간결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가 도입부를 쓸 때 썼던 표현처럼 ‘견실한 글’을 쓰고자 여전히 노력하는 한 대가의 방법론을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서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저자가 쓴 글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쓴 글에 대해 이렇게 엄정한 기준으로 사실을 확인한 후 세상에 내놓는 일은 그 글 뿐만 아니라 잡지사나 출판사의 신뢰와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공인들이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로 발언하고, 이를 그대로 받아 적고 글을 써내는 일부 언론의 모습과 분명히 비교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격려는 아마도 글의 머리에 인용했던 저자의 선언이 될 것이다. 바로 당신이 글쓰기에 좌절해본 사람이라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는 이 말. 글쓰기의 비밀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저자는 이 책에서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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