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전염병 문학'을 생각해보며

 

전염병과 '전염병 문학'을 생각해보며

 

코로나19가 올해 세 번째 유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전염병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이번 기회에 충분히 실감하고 있다. 개인사업자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특히 여행업과 관련한 제반 사업이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모양이다. 반면 출판계는 한동안 도서관과 학교가 제한적으로 운영을 해서 그런지 대체로 잘 버티고 있는 업종에 속한다 한다. 물론 작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언제는 넘어야할 도전이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올해 팬데믹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여러 전염병이 최소 2년 정도는 지속되며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을 떠올리면, 이번에도 쉽게 끝날 것 같진 않다. 특히 지금 겨울철이 되어 다시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나와 주변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버렸는지 생각하다가 스페인 독감이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독감은 1918년 2월부터 1920년 4월까지 만 2년 2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참조). 감염자가 대략 5억 명(당시 전 세계 인구의 대략 3분의 1 감염)이었고, 이로 인한 사망자는 1억 7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로 추산되는 모양이다. 코로나19는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 수가 이미 5천만 명을 넘었으니 안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니 이 작은 바이러스 혹은 병원균(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지만, 인류는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 줄곧 전염병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기억해둘만 하다.

 

     최근에 우연히 국내의 단테 연구자가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의 자취를 쫓아 여행한 기록 《단테》를 읽게 되었다. 단테는 1265년 피렌체에서 출생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35세 였던 1300년에 공직에 선출되어 공적활동을 시작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피렌체 최고위원이 되었다. 그런데 1302년에 교황을 배후지지 세력으로 둔 정적에 의해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19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식객으로 망명생활을 한 셈이다. 단테의 삶을 따라간 이 책 중에서 내가 눈여겨보았던 부분이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대목이었다. 마지막에 라벤나라는 도시의 외교사절단으로 베네치아에 파견을 나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1321년에 56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가 읽고 있는 단테의 《신곡》이나 철학서 《향연》과 같은 저서는 그가 망명생활 중에 본격적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일찍 사망하지 않았으면 피렌체로 교황의 ‘사면’을 받아 귀향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단테가 만약 더 오래 살았다면, 그를 흠모하고 존경하던 조반니 보카치오를 만나 교류하며 더 풍성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데카메론》으로 잘 알려진 그 보카치오다. 그 역시 피렌체(이탈리아 중부) 인근 체르탈도라는 곳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 유명한 단테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보카치오가 태어난 1313년에는 단테가 추방당한지 이미 11년이 지난 시점(단테는 48세)으로 단테의 망명생활 중반에 해당한다. 단테가 객지에서 사망했을 때, 보카치오가 8살이었으니, 두 사람이 지나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단테가 오래 살았다면, 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도 괴테와 에커만과처럼 교류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독일의 대 문호 괴테가 노년에 이르러 요한 페터 에커만이라는 조력자가 나타나 43년의 나이차를 넘어 서로 멘토-멘티 관계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 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와의 대화》를 쓴 인물로, 보카치오처럼 괴테의 작품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푹 빠져있던 젊은 문학도였다고 한다. 노 문호에 대한 존경심으로 에커만은 10여 년에 걸쳐 괴테 옆에서 지켜보고, 그와 대화하며 이 기록을 남겼다. 단테와 보카치오 역시 48년의 나이차이가 있었으니 단테가 말년에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았다면, 단테를 흠모하던 젊은이로 보카치오는 노년에 이른 단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러면 후세인들은 단테의 망명생활과 고뇌에 대해서 작품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단테와 보카치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보카치오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 《데카메론》이 전염병의 영향으로 쓰게 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는데 책 소개에 따르면, 이 작품은 1327년 14세의 보카치오가 1340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뒤, 1348년에 유행했던 흑사병(페스트)의 참상을 목격하고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데카(deca-)’라는 접두사가 숫자 10을 의미하듯이, 이 책의 제목은 젊은 남녀 ‘10명’이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로 가서 자연을 벗 삼아 어울리며 ‘열흘’간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떠나 교외에서 자가 격리를 하던 젊은이들이 스스럼없이 나눈 대화록이라고 예상해본다. 당대(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과도기)의 젊은이들이 삶을 어떤 식으로 향유하고 바라보았을지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전염병이 등장하는 다른 문학을 떠올릴 때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는 소설이라 읽어보긴 했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밋밋하게 다가오긴 했다. 이 책에는 베네치아에 유행하기 시작한 전염병이 등장하는데, 나는 단테 역시 베네치아로 가던 길에, 혹은 베네치아에서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베네치아에 물이 많아서 그런지 향후에 이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모기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는 노작가의 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집착(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이다. 작가 토마스 만의 동성애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고 보다 이해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와의 ‘플라토닉’(동성애) 관계를 떠올려보면서 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전염병은 작품의 주제와는 무관할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주요한 장치 혹은 제한조건으로서 기능한다고 이해된다.

 

     또‘페스트’하면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카뮈의 《페스트》이다. 소설의 배경은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서북부의 도시 오랑이다. 오랑 시는 카뮈가 27살에 파리에서 결혼하고 이듬해에 돌아와 교편을 잡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카뮈는 교편을 잡으면서 동시에 《페스트》를 준비하고 《이방인》을 출간했다. 도시에 어느 순간 쥐들이 나타나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도시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거주지에서 함께 사는 쥐의 벼룩이 인간에게 전염시켰던 것인데, 코로나19가 발병했을 당시에 우한 시가 봉쇄되었던 것처럼 오랑 시가 봉쇄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죽음과 마주한 고립된 오랑 시의 시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는 시공간에서 연대하고 인간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읽었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전염병과 관련한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에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 이 단편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는 ‘삶과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 ‘광기’라는 것이 매개한다. 작품 중에는 인간과 자연과의 대결에서 여지없이 패배하는 인간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기이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광견병에 걸린 개」가 그것이다. 모두 단편이므로 줄거리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배경은 모두 병원균와 관련이 있다. ‘뇌막염’은 대개 혈관을 타고 뇌에 침투한 바이러스나 세균(박테리아)에 의해 발병된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나 세균을 전달한 매개체는 아마도 모기나 벼룩, 진드기와 같은 녀석들일 것이다.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기이한 사랑이야기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와 ‘관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해준 단편이다.

 

     키로가의 「광견병에 걸린 개」역시 ‘광견병’이 주요 모티브인데, 우리가 흔히 개가 ‘물을 무서워하는’ 공수병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광견병 역시 광견병 바이러스가 중추신경계를 감염시킴으로서 발병한다. 광견병이 무서운 것은 광견병에 걸린 개나 야생동물(너구리, 오소리, 박쥐 등)에 물리면, 대개는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스스로를 전파시키기 위해 숙주를 상대적으로 빨리 죽이는 대신, 공격적으로 다른 동물을 물어서 자신을 전파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의인화해서는 안되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전염병이 숙주를 상대적으로 오래 살도록 하는 대신, 다양한 방법(설사, 재채기, 기침, 콧물 등)으로 자신을 다른 숙주에게 전파시키도록 진화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광견병은 특히 개가 인간 사회(수렵-채집 사회)에 사냥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지면서 함께하게 되었을 것이다. 야생에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의 침범(사냥)을 계기로, 그리고 이 개를 매개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우리에게 워낙 유명한 공상과학 소설 작가이지만, 기본적으로 과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특히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명이었던 토마스 헉슬리로부터 직접 진화론과 생태학 등을 배웠다고 한다. 웰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19세기 말에 핵전쟁과 세균전, 광선총, 로봇 등을 예견한 것으로 유명한 SF소설 《우주 전쟁》(1898) 때문이다. 전염병과 관련하여 주목해보면, 이 세발 달린, 고대 그리스의 세발솥 같은 로봇을 타고 파괴를 일삼던 화성인들이 갑자기 전멸하게 되는 이유가 지구의 세균에 대한 면역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이긴 하지만, 박테리아와 면역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다면 쓰지 못했을 놀라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책의 전반부보다는 후반부에 작가의 문명 비판적인 시각이 많이 드러나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소설이다. 톨스토이의 소설들처럼 ‘작가의 말’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공상과학 소설에서 작가의 비판적인 철학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작품에서 작가가 직접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하고자하는 말을 많이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전염병과 관련하여 떠올린 작품이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가 쓴 장편소설 《최후의 인간》이다. 아직 이 책 역시 읽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읽어보려는 목록에 들어있다. 불치의 전염병으로 인류가 전멸하고 한 명이 살아남는, SF의 고전이 된 이야기라고 한다. 《프랑켄슈타인》에서도 그렇지만, 뭐랄까 메리 셸리 역시 ‘죽음’대한 강박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추측해본다. 전류를 흘려주어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장면을 직접 보았을 메리 셸리를 상상해본다. 《프랑켄슈타인》이 죽음에서 생명을 주는 이야기라면, 반대로 《최후의 인간》은 인류의 생명이 사라져가는 풍경을 묘사했던 것 같다. 이 두 이야기의 중심에 모두 ‘죽음’에 관한 문제가 자리한다. 메리 셸리의 어머니 역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사망했으니, 작가에겐 이 ‘죽음’이 평생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수 있겠다. 죽음에 대한 강박이 작품에 드러내는 작가는 앞서 언급한 오라시오 키로가도 만만치 않다.

 

     메리 셸리 역시 작가 소개란을 보면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첫 아들이 출생 직후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자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부모보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을 상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25세에 남편이 익사하여 미망인이 된 그녀는 시인 바이런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소식 이후 《최후의 인간》을 완성했다고 한다. 문학사상 최초로 ‘세계 종말을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가 따르는 이 소설에 불치의 전염병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만 남고 먼저 사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언제나 갖지 않았을까. 성인이 된 메리 셸리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책을 하기도 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추측이지만 첫 남편의 사망 이후, 평생 홀로 살았던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최후의 인간》을 읽을 때, 인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의 고독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남은 그 사람이 바로 메리 셰리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코로나를 ‘극복’하자는 구호로 많은 것을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이 코로나19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울한 결론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냉엄한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전염병과 관련하여 암울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장회익 명예교수의 저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보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한 뉴턴에 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기적의 해 1666년(103면)이라는 소제목을 단 글에서 뉴턴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1665년에 학사 학위를 받고 혼자 공부하던 뉴턴은 그 해에 영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던 역병(페스트)를 피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역병이 유럽을 2년 가까이 휩쓸고 지나가버린 후 정상화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고전 물리학을 정립해냈던 주요 연구를 고향집에서 이루어냈던 것이다. 이 결과에 간접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역병(페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페스트가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과학사에 있어서는 ‘기적의 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병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 신화 만들기에 활용한 사람도 있다. 바로 나폴레옹과 파시즘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시인이자 선동적인 정치가, 군인, 호색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다.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에서 단눈치오는 도시의 사령관으로 지낼 때, ‘야파(오늘날 이스라엘의 자파 지역)에 창궐했던 페스트 환자들에게 과감하게 손을 내밀었다’는 나폴레옹의 신화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신봉자였던 단눈치오 역시 전염병이 돌던 병사들의 막사를 돌면서 나폴레옹이 했던 것처럼 정치적인 쇼를 하기에 이른다. 전염병이 ‘신화만들기’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정도 사례는 아니라도 비슷한 전략은 오늘날 국회의원 선거철만 되면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광경이긴 하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진 않았지만, 여기에도 ‘야파’를 비롯한 이스라엘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들이 심심치않게 등장한다. 아울러 여러 문학작품에도 이 야파, 그러니까 지리학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 속하는 이스라엘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도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흑사병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흑사병의 귀환》이다. 이 책도 다음 기회에 읽을 목록으로 생각해두었는데, 역사학자와 동물학자가 함께 써내려간 흑사병 연대기라 할 수 있다. 한스 홀바인의 그림이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그림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해골은 중세인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 삶의 요소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당시에는 원인도 모르는 전염병등을 통해 언제 죽을지 모를 상태에서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죽음에 관해 많은 성찰의 기록을 남겼던 《수상록》의 작가 몽테뉴도 책에서 자신의 마을을 휩쓸어버린 역병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역병이 자신의 마을을 휩쓸고 있을 때, 몽테뉴는 자신의 몽테뉴성에서‘자가 격리’를 하며 삶과 죽음에 관해 성찰하고 에세이를 썼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염병과 관련한 문학 작품, 도서를 생각하다보니 전염병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가 싶다. 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휩쓸고 가버린 후, 살아남은 이들은 신의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지 않았을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배경에는 유럽인이 세계로 퍼져나가고, 무역을 통해 신흥 귀족이 부를 축적한 물질적인 배경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을 통해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극적으로 뒤바뀌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전염병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상상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올해 읽은 책들을 정리하지 못해 이 기회에 전염병과 관련한 도서, 전염병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을 떠올려 보고 몇 가지 읽어볼 도서도 모았다. 물론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이 더 많을 것이다. 발견하는 대로 ‘전염병 문학’리스트에 추가해나가려고 한다.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콰먼의 책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를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전염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관점에서 ‘인류’를 최종 숙주로 삼은 것은‘자연스럽고 최선의 선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 지구의 모든 자원을 착취 활용하며 그 수가 유례없이 증가하고 있기에, 인간은 바이러스에게 숙주로서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다. 다시말해 인간은 바이러스와 세균에게 가장 ‘핫한’숙주다. 무엇보다 인간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무한정한 이윤추구 활동으로 인해 바이러스와 병원균의 ‘숙주되기’를 자초하고 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이 함께 걸리는 이런 ‘인수공통’ 전염병의 경우, 인간이 이 전염병을‘완전히’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인간과 기타 숙주 동물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하여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인간이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전염병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바이러스 및 병원균과 함께 생존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특히 과도한 이윤추구를 위해 아프리카의 자연과 아마존 밀림을 파헤치고 무단으로 침범하여 훼손하지 않는 것, 언제든 자원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무모하게 이용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비닐과 플라스틱을 사용하며, 더 많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단순히 경제가 파탄난다는 것을 우려하기 전에 우리가 맞물려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플라톤: 좋음의 이데아를 향한 올바른 길을 모색한 철학자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 플라톤을 읽는 8가지 시선

강대진 7 지음 | [아카넷]

플라톤: 좋음의 이데아를 향한 올바른 길을 모색한 철학자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A.N. Whitehead)는 “서양철학사 2천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이 표현은 상당히 잘 알려져있긴 하지만 누군가 왜 그런지를 물으면, 막상 명확하게 대답하기 쉽지 않은 화두다. 표현대로라면 2500년 전 과거의 어느 철학자가 정리한 사상이 우리가 현재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과 그 자리를 규정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또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로서 플라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철학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멀게만 느껴진다. 최근에야 고대 철학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되었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 수많은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출현했고,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과거의 편견과 상식을 전복해왔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고대 철학자들의 세계관과 사유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들과 희곡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시간이 흘러도 고대 철학자들의 철학은 현대의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조명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인간의 철학과 역사는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은 국내의 고대 철학을 연구하는 정상급 연구자 8명이 저술한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를 만나본다. 이 책은 각 저자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강을 기반으로 한다. 특히 고대 사상서를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연구자의 강의를 공유하기도 하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다양한 관심사와 연구분야를 선택한 플라톤 연구자들이 플라톤의 철학 및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대한 독법을 제시한다. 현대의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현대인에게 낯선 고대 그리스 당대의 문화 한 가운데에서 그리스 사회를 바라보고자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각 연구자의 연구 주제와 관심사에 따라 8가지 키워드로 나누고, 이를 분석해가며 고대 서양문화의 단면을 읽어내고자 한다. 전문 연구자인 저자들은 주석 작업을 포함한 원전의 번역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공동 독회 및 토론을 거쳐 번역본을 완성해냈기에 더욱 신뢰를 준다. 이책은 플라톤의 시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 사회, 곧 서양 문화의 기원이 된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고들지만, 문화라는 현상을 독립적인 주제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작업은 불완전한 시도로 남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시대를 달리해도 다양한 측면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구성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고대 서양 문화와 철학의 입문자에게는 플라톤 저서의 핵심적인 주제를 선보이고 ‘개념 익숙해지기’의 기회를 제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이 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숱한 논쟁이 이루어져 왔으며 이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철학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플라톤 철학이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저술이 거의 대부분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각 대화편에서 논의되는 중심 주제 혹은 질문에 대한 답이 명료한 결말로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의 철학은 일종의 ‘열린 철학’이라는 특징에 주목해본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은 각 대화편의 결론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등장인물이 주고 받은 사유의 방식에 주목하는 일인 것 같다. 곧 대화와 토론을 어떤 논리 구조를 통해 사유를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눈여겨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재미있는 것은 플라톤의 저술이 단순히 철학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이 나와 토론과 대담을 벌이며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간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인물은 자신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자 화를 내기도 하고, 마지못해 상대방의 논리에 동의하기도 한다. 플라톤의 저술은 상당부분이 극적 요소가 잘 갖추어진 훌륭한 문학작품, 혹은 철학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의 3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플라톤은 선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작품과 시인을 비판하고,《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시인을 추방해야한다’는 과격한 논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꽤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짙은 문학성을 보여주는 저작의 저자이자 철학자가 시인을 싫어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플라톤의 논리 이면에,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플라톤은 젊은 시절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가가 될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학업을 위해 10대 후반에 아테나이로 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사망한 사건을 목격했을 것이다. 불합리한 다수결에 의해 한 사람의 대 철학자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플라톤은 허깨비같은 정치가의 자리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정치 무대로 나갈 계획을 접고 플라톤은 대신 아테네에 학당을 열었다. 이 책《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 따르면, 플라톤은 그의 중기 저작인 《국가》에서 철인 정치가가 통치하는 ‘최선자 정체’를 주장하지만, 후기 저작 《법률》에서는 민주정과 귀족정이 섞인 ‘혼합정체’를 지향했다.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민주정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성격을 갖춘 환경에서, ‘다수결’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 하에서 융성했던 그리스 비극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비극을 통해 토론교육의 역할이 이루어지는 것을 좋게 바라보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비극시인을 포함한) 시인을 아예 추방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이 책에서는 에로스에 대해 논의하는 《향연》(2장), 용기라는 주제로 논의하는 《라케스》, 플라톤의 우주관 및 철학적 자연관을 보여주는 《티마이오스》와 같이 저자들은 플라톤의 저작 한 편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국가》나 《법률》처럼 여러 저자의 논의에 교차되며 논의되기도 한다. 물론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논하는 주제에 맞는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기 때문에 보다 풍부한 해석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해석 방식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작품 《일리아드》《오디세이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 그리고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처럼 여러 맥락에서 그리스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3장에서 오레스테이아의 비극을 논의의 소재로 하면서, 비극의 형식에 주목하여 비극의 ‘정치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저자는 그리스 비극이 아테나이를 찬양하는 기능, 그리고 토론 기술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음을 언급한다. 반면 그리스의 법과 제도 에 대해 이야기하는 7장에서는 이 ‘오레스테이아 이야기’를 그리스 사회에서 획기적인 재판 제도의 성립을 알려주는 논의에 활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생소하고 흥미있게 다가온 논의는 플라톤의 자연철학이 담긴 《티마이오스》였다(8장). 이 책의 번역을 담당했던 저자는 플라톤의 관심이 그의 저작에서 대우주 천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소우주인 인간에 대한 이해로 돌아오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데, 저자는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눈으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간을 작은 우주로 보았던 플라톤의 신선한 시선에 새삼 놀라게 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이 천체와 인간의 몸, 그리고 건강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보다 ‘훌륭한 인간 공동체의 설명적 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다는 설명이었다. 이건 분명히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개별적인 인간 신체에 대한 궁금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플라톤은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찾았을 것 같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볼 부분은 바로 ‘좋은 삶’이라는 지점이다.

이 ‘좋은 ’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논의되는 ‘좋음의 이데아’와 연결지을 수 있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플라톤의 ‘좋음’이란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46면)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언급하며 철인통치자를 내세웠던 것이나, 시인추방론을 주장한 것도 결국 ‘좋음의 이데아’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또 2장에서 에로스(eros)를 언급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든 ‘결핍’이 있게 마련이다. ‘이데아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해소할, 곧 ‘좋음의 이데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로 에로스를 이해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현대의 동성애와 달리 중장년의 연장자가 청소년인 연소자 사이의 사랑을 통해 젊은이를 이끌어주기도 했던 관계, 곧 ‘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를 이해하는데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아직 미숙한 소년이 경험과 지혜를 갖춘 연장자의 보살핌과 조언을 통해 보다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나니 나만의 오독인지 모르겠지만, 플라톤의 사상이 향하는 맥락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관련하여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플라톤의 종교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1장에서 플라톤이 상당부분 계승하는 종교 사상이 바로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 비교(批敎)와 관련 있다고 했다. 영혼 불멸을 믿었던 그의 영혼관에 당시의 비교(批敎)가 내세에서의 ‘좋음’에 다가가는 방안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 한 예로,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인 현실 세계에서 결핍을 느끼는 인간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본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 범죄의 교정가능성을 믿고 ‘모든 부정의한 행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보았던 플라톤의 인간관 및 정의관 역시 이런 이데아로 향하는 인간의 노력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앞으로《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 언급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나갈 때 입문자는 이 책을 통해 해당 저작의 이해에 핵심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겠다.

물론 플라톤 해석이 여전히 학문적으로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저서는 명료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는 플라톤의 의도를 따라가며 한 가지 대안으로서 각 저자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참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독서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는 점은, 플라톤이 ‘인간의 삶’을 ‘좋은 삶’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검토할 수 있는 모든 사항을 따져물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혼자만으로 생존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인간들’의 삶이 ‘좋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 플라톤은 종교와 법, 사랑, 우주와 인간, 용기에 대한 모든 항목을 우선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나만의 주제넘은 해석일지 모르지만, 이번 독서를 통해 내가 이해한 플라톤 철학의 핵심 중 하나는,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로 향하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 나의 오독은 앞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나가며 새롭게 검토를 하며 바로잡히길 기대해본다.

[참고]

책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저서들이 집필 시기에 따라 보통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서 언급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기

《리시스》, 《라케스》, 《변론》, 《크리톤》,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 《에우튀프론》

중기

《국가》, 《파이드로스》, 《파이돈》, 《향연》

후기

《티마이오스》, 《파르마니데스》, 《필레보스》, 《노모이》, 《소피스트》, 《법률》

마음에 꼭 드는 날 -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마음에 꼭 드는 날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 박수밀 글 | [메가스터디북스]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퍼지던 지난 여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본다. 책 미치광이라는 의미의 간서치로 불리는 이덕무 선생의 단상을 모아놓은 책이다. ‘나는 나를 벗 삼는다’는 의미의 <오우아(吳友我)>. 이덕무 선생은 호를 여러 개 갖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오우아거사(吳友我居)’라고 한다. 당대의 신분적 제약으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지독히 가난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그 삶의 고단함은 지금 내가 속한 환경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 테다. 그에게도 친분을 나누던 박지원, 홍대용 등 선배, 친구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고난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붕이 뚫려 있고 기둥마저 기울어가는 초가집 단간 방에서 한겨울 엄습해오는 외풍을 막기 위해 책을 뜯어 막고, 이 책들로 이불삼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슬픔이 닥치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해서 그저 한 치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고,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진다.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중에서 재인용(43면)

 

그럼에도 이덕무는 ‘다행히’ 두 눈이 있고, 책을 읽을 수 있어 절망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었노라고 말한다.

나 역시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나와 가족이 어려운 환경에 놓이기도 한 것 같아 그저 막막하고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나마 책을 읽곤 하는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때론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일까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의 고민과 죄책감과 미안함, 때론 땅 깊숙이 꺼질 것 같은 좌절감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나의 좋은 환경만을 보거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보라고 할 뿐. 이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실없는 소리만 하는 별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문해본다. 나는 타인의 삶을 제대로 공감한 적이 있는지, 혹은 노력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지 말이다.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내 삶을 지금까지 되돌아보면 좋은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 둘러싸여 유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서 나의 힘으로 생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엔 홀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타인의 친절을 거부하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가장으로서 막막한 심정을 이덕무의 글에서 만난다.

 

복숭아 나무아래서 붓가는 대로 쓰다

다시 <오우아>를 뒤적이다가 또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덕무 선생이 아이의 손을 잡고 복숭아 나무 아래로 갔다. 나뭇잎을 따고, 아이와 함께 나뭇잎에 붓으로 글씨를 썼다. 마음이 가는대로. 이덕무 선생의 생각이 이어진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근심 걱정은 있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일 년 아니 한 달에 마음에 딱 맞는 날이 얼마나 될까?

-이덕무 <만제정도(?題庭桃)>중에서 재인용(44면)

 

지금으로부터 358년 전인 1762년 6월 21일의 기록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뭇잎에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자들을 보며 미소 짓는 두 부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가난, 가족들의 병치레에 근심이 끊이질 않았을 그의 서글픔을 느끼다가도, 이 찰나의 ‘행복감’을 잊지 않은 선생의 마음을 읽어본다. <오우아>의 저자가 한 상상대로 이덕무는 아이와 저물녘 마루에 앉아 순간의 평화로움을 즐겼을 것이다. 문득 사람이 일생을 마칠 때, 이런 일상의 추억 하나 남아 있지 않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소똥'을 아끼다

이덕무 선생의 고난과 근심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시하고 포장하는 나의 모습도 발견한다. 나 자신을 너무나 오랫동안 불신해왔던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나를 드러내고, 나의 견해를,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도출된 견해를 단정해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의 두려움, 나의 무지를 제대로 마주보고 들여다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의 감정을 느끼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이 과연 어떤 것인지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 바쁜 사회생활에 매몰되어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이런 나의 두려움, 무지, 나의 결핍을 제대로 인식해보고 나의 입장을 정하는 것, 나름의 답을 구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줄곧 회피해온 것은 아닐까. 이 작업은 누구나 홀로 해내야 하는 것이지만, 이 과제의 양상이 나만의 것임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다만 내가 책을 읽는 일은 나의 결핍을 자각하고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 책을 통해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이 책에 쓰여 있을 리 없다. 다만 수많은 이들이 남긴 사유의 기록만이 내 앞에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기록만은 아니고, 개별적인 의식의 수준을 넘어서 공유되는 보다 보편적인 의식이 있을 것 같다. 선배들이 지나온 과정을 통해 내가 내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난 길을 갈지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이덕무 선생이 당신의 호를 ‘오우아거사’로 한 것이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자신을 긍정하고 아끼겠다는 다짐과도 같이 느껴진다.

소똥구리는 소똥 경단을 스스로 아끼기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중 재인용(189면)

 

이덕무의 <선귤당농도>는 그가 20대 중반에 쓴 산문집이라고 한다. ‘선귤당’ 또한 이덕무 선생의 호다. ‘매미와 귤이 어우러진 집’에서 활짝 웃는 이덕무 선생을 상상해본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문장들로 씌여 있다. 오늘 무언가에 근심과 서글픔을 느꼈다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발견’하고, 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소똥’이 있을 것이다. ‘나의 소똥’을 아끼는 것. 이게 오늘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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